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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잠든 그 나무 보란 듯…‘피터팬 아들’ 무 심고 웃었다 [르포]

중앙일보

2026.09.17 13:00 2026.09.17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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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전경철 작가의 아들 제원씨가 지난 14일 오후 충북 제천의 에코마실 원예치유 농장 사무실에서 교육을 기다리며 웃고 있다. 최종권 기자

고 전경철 작가의 아들 제원씨가 지난 14일 오후 충북 제천의 에코마실 원예치유 농장 사무실에서 교육을 기다리며 웃고 있다. 최종권 기자



산속 돌봄마을서 행복 꿈꾸는 ‘피터팬’

지난 14일 오후 충북 제천시에 있는 에코마실 원예치유 농장. ‘피터팬 아빠’로 알려진 고(故) 전경철 작가(지난 5일 별세)의 아들 제원(27)씨가 파종용 흙더미를 이리저리 헤치고 있었다. 발달장애를 가진 제원씨의 인지·사회성 향상을 위해 돌봄시설이 마련한 야외 활동 수업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온다고 한다.

제원씨는 이날 김윤호 에코마실 대표의 도움을 받으며 가을 무를 심고, 다육식물을 손질했다. 따가운 볕 탓에 몇 번 자리를 벗어났지만, 이내 돌아와 씨앗을 심고 흙을 꾹꾹 눌렀다. 할 수 있는 소리는 여전히 ‘애·에’ ‘빠’ 정도였다. 말은 할 수 없지만, 뭔가를 요구할 때 두 손을 모아 ‘주세요’라는 몸짓을 했다.

점심을 먹고나서는 펄쩍 뛰며 웃기도 했다. 박선엽 활동지원사는 “처음 한두 달은 잠을 설치고, 침대에 누웠다가 돌아다니거나 옷을 갈아입는 등 이상 행동도 했었다”며 “지금은 주간활동도 곧잘 참여하고, ‘도전행동(위협을 주는 행동)’도 줄었다. 잠잘 때도 더 안정된 상태”라고 했다.
고 전경철 작가의 아들 제원씨가 지난 14일 충북 제천의 에코마실 농장에서 무 파종 체험을 하고 있다. 최종권 기자

고 전경철 작가의 아들 제원씨가 지난 14일 충북 제천의 에코마실 농장에서 무 파종 체험을 하고 있다. 최종권 기자



“도전행동 줄었어요” 무 파종하고 자연 속 산책

자폐성 발달장애를 갖고 태어난 제원씨는 성인이지만, 정신 연령은 두 살 정도에 머물러 있다. 그를 27년간 홀로 돌봤던 전 작가는 아들을 동화 속 피터팬에 비유해 부르곤 했다. 고인은 지난해 4월 간암 말기 진단을 받고 홀로 남겨질 아들을 걱정하며 전국 1000여 곳의 장애인 거주시설·복지기관의 문을 두드렸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이 같은 사연이 알려진 후 제원씨가 우여곡절 끝에 찾은 보금자리가 사회적기업 ㈜희망그린마을이다.

희망그린마을은 발달장애인의 돌봄·자립이 한 곳에서 이뤄지는 맞춤형 통합 모델을 목표로 2008년 설립됐다. 발달장애인의 복지를 비롯해 활동사 일자리 제공, 캠핑사이트 임대·농업 경영 수익 창출 등 방식으로 운영된다. 숲이 우거진 박달재 인근 약 6만6000㎡(2만평) 부지에 숙소동과 주간활동·24시간 통합돌봄서비스 센터, 식당, 체육시설, 농장 등을 갖췄다. 제원씨를 비롯해 최중증·경중증 발달장애인 28명이 보살핌을 받고 있다. 희망그린마을 측은 제원씨의 장애수당에 후원금·수익사업비 등을 보태 그를 지원하고 있다.

방대진 희망그린마을 대표는 “제원이가 지난 3월 9일 입소한 뒤에 6개월여간 큰 탈 없이 적응하고 있다”며 “자연이 어우러진 넓은 공간에서 산책도 하고, 뛰어놀다 보니 도전행동이 많이 줄었다. 거주 환경만 바꿔줘도 스트레스가 확 낮아지는 경우가 있는데 제원이가 그런 사례”라고 설명했다.
충북 제천 희망그린마을에 있는 한 나무 밑에는 '피터팬 아빠'로 불리는 고 전경철 작가의 유해가 수목장 됐다. 전 작가를 추모하는 꽃과 둘레돌이 놓여있다. 최종권 기자

충북 제천 희망그린마을에 있는 한 나무 밑에는 '피터팬 아빠'로 불리는 고 전경철 작가의 유해가 수목장 됐다. 전 작가를 추모하는 꽃과 둘레돌이 놓여있다. 최종권 기자



아들 보이는 곳 잠든 아빠…세상 떠나기 2주 전 마지막 발걸음

단체 생활이 힘든 제원씨는 23.1㎡(7평) 크기 1대1 개별형 지원주택에 살고 있다. 2층 침대와 화장실이 딸린 원룸형 구조다. 주간활동(오전 9시~오후 5시)을 마친 후 잠이 들 때까지 활동지원사 1명이 생활 보조를 하고 있다. 제원씨 집에서 40m 떨어진 느티나무에는 전 작가의 유해가 수목장 됐다. 나무 밑에는 전 작가를 추모하는 꽃과 둘레돌 여러 개가 놓여있었다.

희망그린마을 측은 조만간 작은 추모 공간을 만들 계획이다. 김수정 최중증시설팀장은 “‘아들이 잘 보이는 곳에 있고 싶다’는 고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유해를 선산과 희망그린마을에 나눠서 모셨다”며 “전 작가님이 지난달 23일께 마지막으로 다녀가셨다. 제원이가 동요할까 봐 아들에게 얼굴은 보이지 않고, 어떻게 생활하는지 자립 지도는 잘 되어가고 있는지만 여쭤보셨다”고 했다. 최중증 발달장애인 자립을 돕는 피터팬 재단 설립에 관한 논의도 했다고 한다.

희망그린마을은 시설장과 활동지원사, 발달장애인이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작은 마을 같았다. 활동지원사 20여 명 중 7명은 이곳에 입소한 발달장애인의 부모로, 주돌봄자의 경제적 보탬과 동시에 장애인 거주시설의 폐쇄성을 극복하고 있다. 방 대표는 “부모들이 함께 참여하면서 입소자 인권 보호와 시설 운영의 투명성을 높였다”며 “최소 20년 이상 아이를 양육·보호한 부모들의 노하우가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고 전경철 작가의 아들 제원씨가 지난 14일 충북 제천에 있는 희망그린마을 인근 캠핑장에서 김수정 최중증시설팀장과 산책을 하고 있다. 이곳은 고 전경철 작가가 지난 7월 제원씨와 마지막 밤을 보낸 캠핑장으로, 제원씨가 가장 좋아하는 산책 코스라고 한다. 최종권 기자

고 전경철 작가의 아들 제원씨가 지난 14일 충북 제천에 있는 희망그린마을 인근 캠핑장에서 김수정 최중증시설팀장과 산책을 하고 있다. 이곳은 고 전경철 작가가 지난 7월 제원씨와 마지막 밤을 보낸 캠핑장으로, 제원씨가 가장 좋아하는 산책 코스라고 한다. 최종권 기자



희망그린마을, 사회성 고려 거주 선택·맞춤형 통합 돌봄

방 대표는 최중증발달장애인을 위한 맞춤형 통합 돌봄을 강조했다. 그는 “주간활동·주거·의료 지원 등이 끊기지 않고, 한 공간에서 통합적으로 이뤄지는 게 희망그린마을의 장점”이라며 “수요자가 필요한 부분을 하나씩 개선하는 ‘만들어 가는 복지’를 지향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곳에 온 발달장애인들은 자폐 수준과 사회성을 평가해 5개 형태의 거주시설에 머무르고 있다. 돌봄을 크게 필요로하는 중복장애 대상자의 경우 낮 활동과 야간(주거) 돌봄을 지원하는 24시간 지원체계를 갖췄고, 그보다 사회성 지수가 높고 돌봄 형태가 비슷한 대상자를 1~2명이나 3~4명씩 그룹을 지어 돌보고 있다.

조만간 발달장애인 부모와 활동지원사가 함께 머무는 공동육아 지원주택도 마련할 계획이다. 낮에는 3~4개의 별도 공간에서 개인별 수준에 맞는 주간 활동을 지원한다. 오미자나 고추를 기르는 등 영농 활동을 하고, 가까운 곳으로 여행도 간다.

방 대표는 “발달장애인을 위한 여러 서비스가 늘어나고 있는 건 긍정적이지만, 각 제도가 분절돼 있는 데다 부모가 신청해야 하는 구조라 이용에 어려움이 있다. 수요자를 고려한 코디네이팅 기능을 보완해야 할 것 같다”고 조언했다. 이어 “발달장애인 지원의 양적 팽창에 맞춰, 이를 소화할 수 있는 양질의 종사자 배출에도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종권([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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