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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언대] 인천의 승리 뒤에는 장사의 피가 있었다

Los Angeles

2026.09.17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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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학 6·25참전유공자회 회장

이재학 6·25참전유공자회 회장

9월이 오면 76년 전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나는 6·25전쟁 당시 16세의 학도병이었다. 지금의 학제로 치면 고등학교 1학년 나이였다. 어린 나이에 총을 들었던 내가 오늘까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날의 전우들에게 빚을 지고 살아간다는 생각을 한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남침하자 서울은 사흘만에 함락됐다. 어머니는 신문지에 밥을 싸주시며 말씀하셨다. “인민군을 피해 무조건 남쪽으로 가거라.” 피난길 떠나는 아들에게 해주신 어머니의 마지막 당부였다.
 
나는 용인 어느 산속에 피신해 있던 학생 20여 명과 함께 북진하는 국군 제1사단 수색대에 합류했다. 전쟁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까이 죽음을 데려왔다. 어느 날 퇴각하는 인민군 패잔병 두 명을 마주쳤다. 무장도 제대로 하지 않은 학생 몇 명이 용기를 내어 그들을 생포했다. 지금 생각하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두려움보다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앞섰다.  
 
전쟁의 흐름이 9월 들어 바뀌기 시작했다.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과 유엔군이 북한군의 공세를 막아내는 동안 맥아더 장군은 전세를 뒤집을 대담한 작전을 준비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기습은 성공했다. 인천에 상륙한 유엔군은 서울을 향해 진격했고, 9월 28일 마침내 수도 서울을 탈환했다. 세계 전사에 기록될 위대한 승리였다.
 
그런데 인천상륙작전 바로 전날, 동해안 영덕 장사해변에서는 또 하나의 상륙작전이 벌어졌다. 장사상륙작전이다. 772명의 어린 학도병들이 적의 눈을 동부전선으로 돌리기 위한 양동작전에 투입됐다. 인천상륙작전의 주공을 숨기고 북한군의 병력을 분산시키기 위한 희생적인 작전이었다.  거센 파도 속에서 상륙정이 좌초되고, 학도병들은 적의 총탄을 뚫고 해안으로 올라갔다. 772명 가운데 139명이 전사했고, 350명 이상이 돌아오지 못했다. 나 역시 학도병이었기에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인천의 승리 뒤에는 장사의 피가 있었다.
 
그무렵 나도 서울 탈환의 그 길에 있었다. 인천에 상륙한 해병들과 마포 한강을 건너 상륙한 우리 부대가 함께 서울 시내를 향해 진격했다. 그때 잠복해 있던 인민군 저격병의 총탄에 맞아 해병 한명이 쓰러졌다. “앞으로 가면 위험하니 뒤로 쫓아오라.” 바로 곁에 나에게 말했던 그 해병이었다. 그는 어린 나 대신 전사한 것이다. 그 순간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다.
 
그래서 나는 장사해변에서 쓰러진  평균 연령 17세의 어린 학도병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전쟁의 승리는 무기와 병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적을 속이고, 병력을 분산시키고, 결정적인 순간에 전력을 집중하는 전략과 전술, 그런 작전을 가능하게 한 병사들의 희생이 승리를 만든다.  
 
장사상륙작전은 바로 그런 작전이었다. 맥아더 장군도 이 어린 학도병들의 충성과 헌신을 기억하며 그들의 희생을 기리는 뜻을 편지로 전해 왔다.
 
9월은 승리의 달이다. 그러나 그 승리는 결코 공짜가 아니었다. 76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날을 부른다. 장사해변에 잠든 어린 학도병들이여,/ 이름 없이 쓰러져간 전우들이여./ 피로 지킨 대한민국/ 우리는 결코 잊지 않으리!

이재학 / 6·25참전유공자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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