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여성 한복은 저고리 길이가 짧아서 치마 말기가 많이 드러나는 게 특징이다. 김영진 한복 디자이너는 시대 고증을 기반으로 자신만의 한복을 선보였다. 최영재 기자
‘사극’을 보는 재미 중 하나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시대를 고증과 상상으로 풀어낸 시각적 장치들이다. 그런 점에서 18일 시작한 넷플릭스 시리즈 ‘스캔들’은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다. 18세기 프랑스가 원작인 소설 ‘위험한 관계’를 조선시대 18세기로 옮기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화려하고도 우아한 미장센을 유감없이 펼쳐냈다.
사실 이번 시리즈에 참여한 많은 제작진들에게는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2003년 작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다. 이미숙·배용준·전도연 등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참여했고, 패션 디자이너 정구호가 미술감독을 맡아 제작비 50억원의 절반가량을 의상과 소품에 쏟아부어 국내 최초의 본격적인 코스튬 드라마(Costume Drama)로 우리 기억 속에 자리 잡은 작품이다. 코스튬 드라마란 일정한 역사 시기를 배경으로 그 시대의 의상이나 소품 등 당대의 시대적 특성을 시각적으로 재현한 영화나 TV 드라마를 말한다.
‘의상·시대의상’을 뜻하는 ‘코스튬’이라는 용어도 여기서 유래한 것인데, 그만큼 시대상을 나타내는 데 있어 가장 주목을 끄는 요소는 ‘의상’이라 할 수 있다. 23년 전 화제작의 기억을 딛고 새로운 코스튬 드라마를 선보인 넷플릭스 시리즈 ‘스캔들’의 의상과 비주얼 디렉팅은 ‘한복계의 샤넬’이라는 수식어로 통하는 김영진 한복 디자이너가 맡았다.
전통 한복 맞춤 브랜드 ‘차이 김영진’과 한복에 현대적 터치를 더한 기성복 ‘차이킴’의 대표인 김영진은 영화 ‘해어화’ ‘조선마술사’,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등에서 주인공들의 한복 의상을 만든 바 있다. 연극 ‘햄릿’(2016)을 비롯해 국립오페라단의 ‘동백꽃 아가씨’(2017) ‘화전가’(2025), 국립창극단의 ‘심청가’(2018) ‘귀토’(2021) ‘베니스의 상인들’(2023), 국립극단의 ‘화전가’(2020), 국립무용단의 ‘행+-’(2024) 등의 공연 무대 의상도 그의 손을 거쳤다. 스타들의 스타이기도 해서 고객 명단에는 BTS, 틸다 스윈튼 등 세계적인 스타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유명 스타라고 공짜로 빌려주는 ‘협찬’은 절대 없으니 이 고객 명단은 모두 ‘내돈내산’이다.
지난 15일 ‘차이 김영진’ 숍에서 만난 그는 벽돌만큼 두꺼운 파일들을 여럿 보여줬다. 모두 ‘스캔들’ 의상을 위해 만든 것이다. 표지에는 ‘SCANDLE’이라는 영문 제목이 일곱 빛깔로 씌어 있었다. 작품 속 7명의 주요 인물들에 부여한 컬러들이다.
올리브 그린과 새싹 빛깔을 조합한 조씨부인(손예진). [사진 넷플릭스]
“조씨부인(손예진)의 컬러는 그린이에요. 소녀일 때는 새싹 같은 그린, 나이 들어 정서가 고조될수록 검정에 가까운 그린으로 변화하죠.” 고혹미 넘치는 조씨부인의 컬러라면 응당 레드나 와인 컬러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과 매력을 지녔지만 여인으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대의 현실에 막힌 조씨부인은 아주 총명하고 예술적 자아가 뛰어난 여자에요. 그래서 그린의 중성적이고 열려 있는 색감이 더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죠.”
소색 저고리를 입은 희연(나나). [사진 넷플릭스]
반면 혼례를 올리기도 전에 남편을 잃은 청상과부로 정절과 절개를 위해 자신의 삶조차 허락받지 못한 ‘희연(나나)’의 컬러는 소색(素色)이다. 소색은 염색을 안 한 무명이나 삼베의 고유색으로 형광기가 가미된 백색과는 다르게 따스함이 느껴지는 컬러다. 표백 기술이 발달되기 전까지는 백색을 소색이라고 했다.
푸른 쪽빛을 주 컬러로 한 조원(지창욱). [사진 넷플릭스]
이 외에도 김영진은 특유의 컬러 조합으로 아름다운 한복들을 만들어냈다. “18세기라는 시대적 배경에 맞게 ‘혜원수첩’을 비롯한 당대의 그림과 출토 유물들을 찾아 고증하며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보는 사람도 만드는 사람도 재미가 없잖아요. 그래서 김영진만의 해석도 보탰죠.”
예를 들어 ‘스캔들’에는 베드신이 꽤 있어서 속옷까지도 전통적인 속옷을 만들어야 했다. 여성의 경우 겉저고리 안에 속적삼·속저고리를 입고, 치마 안에는 하체를 종 모양으로 예쁘게 부풀리기 위해 다리속곳·속속곳·바지·단속곳을 입었다. 남성도 겉저고리 안에 속적삼·속저고리를 입고, 하의는 바지 안에 짧은 반바지 형태의 잠방이를 입었다. 등잔불도 꺼진 밤에 슬쩍슬쩍 보이는 속옷들이지만 대충하는 건 싫었다고 한다.
“베드신이 여럿 나오니까 똑같은 속옷을 계속 입히기도 싫었어요. 디자이너의 상상력을 발휘해서 어떤 사람의 속옷은 핑크색이기도 해요.(웃음)” 그런데 이게 아주 허무맹랑한 상상은 아니라고 한다. “출토복식들을 보면 의외의 것들이 많아요. 조선시대라고 꼭 속옷은 흰색이었을까요? 이불 속에서나 보는 속옷이니 개인의 취향껏 염색해서 입은 사람도 있지 않았을까요?”(웃음)
뒤꽂이·비녀·갓 등 액세서리도 허투루 넘어가지 않았다. “옷과 제대로 어울리는 컬러와 조형미의 액세서리를 해야 ‘태(아름답고 보기 좋은 모양새)’가 나죠. 방송 제작비는 한정돼 있고, 대충 만든 것을 쓰려니 자꾸 눈에 거슬려서 못 참겠더라고요.” 결국 무형문화재 선생님들의 작품을 비롯해 가격을 매길 수도 없는 20년 간의 개인 수집품을 총방출했다. 현장 스태프들이 헷갈리지 않도록 의상마다 액세서리를 일일이 조합하고, 어떤 각도로 어떤 모양으로 해야 하는지 세부 설명서까지 만들었다. “‘저 여자는 왜 뒤통수에 하는 뒤꽂이 하나 갖고 저렇게까지 심각할까’ 했겠지만 나한테는 그게 정말 중요하거든요. 색 하나만 잘못 써도 실내 온도가 달라지니까요.”
김영진은 ‘패션한복’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한복의 일상화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니 특별한 날 멋을 부려 명품 옷을 입듯, 좋은 한복을 차려입는 거죠.” 스타일리시한 패션한복 중에 전통의 장점과 가치를 잘 살려서 나만의 개성을 찾는 ‘김영진 스타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