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어느 주말, 경기도 용인의 한 워터파크. 박석호(41·가명)씨는 여섯 살 딸의 손을 잡고 탈의실 앞에서 섰다. 남자 탈의실에 갈 수도, 여자 탈의실에 갈 수도 없었다. 한 여성이 말을 걸었다. “제가 데리고 들어갈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딸이 나올 때까지 박씨는 탈의실 밖에서 혼자 눈물을 훔쳤다.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 했다”고. 딸은 아빠만 바라본다. 아빠는, 한부모 가족의 가장이다.
추석은 가족의 날. 그러나 ‘보통 가족’의 틀에서 벗어난 이들도 있다. 그렇다고 특별한 여김을 받고 싶지도 않다. 더 도드라져 보이기 때문이다. 명절은 누군가에게 더 힘든 순간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은근슬쩍 배려’다. 전용호 인천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대개 증가하는 출생아와 혼인 건수에 초점을 맞추지만, 숫자로 잘 잡히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가정의 형태도 들여다봐야 한다”며 “그게 진정한 국민의 나라”라고 진단했다.
중앙SUNDAY는 추석을 앞두고 한부모·장애인·가족돌봄청년·다문화 가정을 찾았다. 이 외에 더 많은 가족의 형태가 있지만, 우리는 더 넓게 보듬을 기회를 반드시 마련하기로 했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아이 아파도 맡길 곳 없어 홀로 두고 출근” 박씨는 3년 전 이혼하고 딸을 혼자 키운다. “친척들이 ‘혼자 애 키우느라 고생한다’고 위로하는데, 그 말조차 마음을 후빌 때가 있다”고 털어놨다. 경기도 수원에 사는 최성훈(38)씨의 비슷한 사정. 아이가 갑자기 열이 났는데, 휴가를 내지 못해 결국 아이를 혼자 집에 두고 출근했다. “점심시간에 전화해서 물이라도 마셨는지 확인하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전부”라고 했다.
정순둘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입법이나 예산 같은 거시적 가족 정책도 중요하지만, 아이 혼자 두고 출근하는 최씨처럼 아주 사소해 보이는 일상의 장면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라며 “제도 설계자들이 이런 디테일을 놓치면, 아무리 예산을 늘려도 체감하는 변화는 더디다”고 진단했다.
한부모 가정의 체감은 넉넉지 못한 살림살이에서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평등가족부에 따르면 한부모 가정의 월평균 소득은 294만6000원이다. 전체 가구(488만7000원)의 60% 수준에 머문다. 순자산액은 전체 가구의 25.8%에 불과하다.
전용호 교수는 “어떤 형태의 가족이든 일정한 소득이 중요한데, 한부모 가정의 경우 돌봄 정책이 보통의 가정보다 긴요하지만, 일상생활의 밑천을 마련할 수 있는 일자리, 즉 노동 정책이 우선 지원돼야 한다”고 주문했다.
경기도 성남의 이명한(56)씨는 20대 아들을 돌본다. 아들은 발달장애가 있다. “돌봄은 평생 이어진다”고 이씨는 말했다. 그는 명절이 불편하다. “조카들 대학·취업 얘기가 오가다가, 아들 얘기가 나오면 분위기가 싸~해진다”고 했다. 정 교수는 “이씨 같은 분들의 걱정은 본인의 노후 대책이 아니라, 자녀가 평생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을 마련하는 것인데, 지금은 그런 시설이 부족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50대 발달장애 딸을 둔 70대 조모씨는 한숨부터 내뱉었다. “아이고. 아직은 내가 체력이 되지만, 얼마 전 허리 수술을 받으면서도 입원까지 미룰 정도로 딸을 돌봤는데. 다음엔 어쩌나 싶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더 사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조씨 모녀 같은 가정은 더 늘어날 전망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등록장애인은 262만7761명. 전체 인구의 5.1%다. 이 중 65세 이상이 56.9%(149만6135명)에 달한다. 10년 전인 2015년엔 42.3%였다. 정 교수는 “노인이 된 뒤 장애인이 되는 경우가, 장애인이 노인이 되는 경우보다 더 많다”며 “돌봄 정책을 짤 때 노인과 장애인을 따로 떼어놓고 볼 게 아니라 두 인구 집단이 겹치는 지점을 잘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돌봄의 부담을 지는 건 부모만이 아니다. 자녀가 부모를, 손주가 조부모를 돌보는 경우도 있다. 이른바 ‘영케어러(가족돌봄청년)’다. 대학생 박모(23)씨는 고등학생 때부터 뇌졸중을 앓는 아버지를 돌봤다. “친구들이 야자(야간자율학습)를 할 때 나는 병원에 있을 때도 잦았다”고 했다. 취업준비생 윤모(26)씨는 치매를 앓는 할머니를 돌보며 3년째 취업 준비를 이어가고 있다. “요양보호사가 오는 시간에 맞춰서만 스터디도, 면접도 잡을 수 있다”며 “그마저도 할머니가 갑자기 컨디션이 안 좋은 날엔 다 취소하고 집에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돌봄뿐 아니라 노동정책 연계 정책 필요” 통계청에 따르면, 2020년 국내 가족돌봄청년(13~34세)은 15만3044명이다. 해당 연령대 전체의 1.3%다. 그런데 이들의 61.5%가 우울 상태다.(보건복지부) 올해 처음 ‘돌봄통합지원법’이 시행돼 제도가 뒷받침됐다. 하지만 제도가 생긴 것과 실질적인 지원은 별개다. 최혜지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우리 돌봄 제도는 노인·아동·장애인처럼 대상을 콕 집어 분절적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러다 보니 특정 범주에 딱 들어맞지 않는 사람들이 대거 지원에서 빠지고, 그 공백에 지금 어린 가족 돌보미들이 있는 것”이라며 “이들에게 도움을 줄 예산이 실제 필요한 규모의 절반 정도밖에 확보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학교의 역할도 강조했다. “영케어러 돌봄 정책 논의에서 교육청은 쏙 빠져 있다. 부처 간 칸막이를 허물 수 있는 통합 컨트롤타워인 이른바 ‘돌봄청’에 대한 실질적인 논의도 구체적인 그림은 없다”고 말했다.
다양한 가족의 얼굴은 국경을 넘어 만들어지기도 한다. 다문화 가정이다. 베트남 출신 아내와 결혼한 정모(41)씨는 “아이가 학교에서 ‘엄마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놀림당할까 봐 걱정”이라고 했다. 필리핀 출신 아내를 둔 강모(45)씨는 “아이 학교 준비물 안내문에 나오는 한자어를 아내가 못 읽어서, 매번 내가 퇴근하고 다시 설명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지난해 다문화 가정 출생아는 1만3416명으로, 전년보다 10.4% 늘었다. 2012년 이후 12년 만의 반전이다. 다문화가구 수도 2015년 29만9241가구에서 2025년 45만1492가구로 꾸준히 늘었다. 그런데 이런 가정이 겪는 어려움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데다, 사는 곳에 따라 격차도 크다. 통번역 지원이나 다문화가족지원센터 같은 인프라는 여전히 수도권에 몰려 있지만, 인구 대비 다문화 가정 출산 비중은 오히려 지방에서 더 높다.
한건수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한국이민학회장)는 새로운 정책보다 기존 정책의 재점검이 먼저라고 봤다. 그는 “정부는 지난 20여년간 필요한 정책을 계속 내놨다. 지금 필요한 건 새 정책보다, 해왔던 정책들이 왜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았는지 점검하는 일”이라며 “다문화 가정 자녀의 학업이 부진하다면, 엄마가 외국인이어서인지 저소득층 자녀들이 공통으로 겪는 사교육 소외 문제인지부터 구분해야 한다”고 전했다. 한 교수는 또 “다문화 가족 안에도 저소득층이 있고 전문직 종사자로 온 가정도 있는데, 그 다양성을 지금의 지원 범주가 못 따라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원의 폭을 복지 바깥으로 넓혀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전 교수는 “다문화 가정을 포함해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에게 필요한 건 돌봄이나 상담 같은 복지 차원의 지원만이 아니다. 지역사회에서 문화 활동을 하고 사회에 참여할 기회와 장소가 아직 제한적”이라며 “물리적인 공간과 실질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행사 등 기회를 늘리는 게 지자체와 정부 모두의 과제”라고 말했다.
추석을 앞둔 지금, 한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겐 보통의 가정도, 특별한 가정도 없다. 함께 사는 사람들이고, 함께하는 식구이고, 가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