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미국 건국 250주년이라는 뜻깊은 역사적 이정표와 함께, 9·11 테러 25주년의 엄숙한 해이기도 하다. 지난 11일 진행된 추모식에서 밤하늘을 밝힌 ‘빛의 추모(Tribute in Light)’는 비극의 상흔을 넘어 연대와 희망의 가치를 일깨웠다.
미국은 두 번의 공격을 받았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침공과 2001년의 9·11 테러다. 진주만 침공이 국가 간의 충돌이었다면, 9·11 테러는 인류 공통의 안전을 위협한 폭거였다. 두 사건 모두 수많은 무고한 생명을 앗아갔고, 미국 사회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역사가 주는 교훈은 ‘숙적 관계의 변화’와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실’이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렀던 미국과 일본은 불과 몇십 년 만에 가장 견고한 동맹이자 파트너가 되었다. 이러한 관계 변화의 배경에는 경제적 힘이 자리 잡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미국이 국제 외교 무대에서 일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는, 일본이 미국 국채의 최대 보유국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9년 미·북 간 제3차 하노이 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결렬되었을 때, 아베 신조 당시 일본 총리는 대북 강경책을 고수하며 미국을 설득하고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외교적·경제적 영향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미국 입장에서 일본의 전략적 입장과 견제를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과거 독일 통일이 영국과 프랑스 등 주변국들의 동의와 협조 없이는 불가능했던 것처럼, 한반도 역시 일본의 협력과 동의 없이 남북통일과 평화 구축을 이루어내기는 매우 어렵다. 따라서 일본과는 과거의 비극에만 매몰되기보다,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구축하고 협력을 모색하는 것이 한반도 평화를 위한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북한의 일본 나고야 아시안게임 선수단 파견은 새로운 가능성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과거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당시 북한의 참가를 기점으로 남북이 극적인 화해의 물꼬를 텄던 것처럼, 북한 선수단의 일본 방문이 일·북 관계와 남북 관계의 얼어붙은 실타래를 풀고 새로운 소통을 시작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세계는 지금도 참혹한 전쟁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란전쟁 등으로 무고한 민간인의 희생도 이어지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유가가 치솟고 세계 경제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실정이다.
미국이 초강대국의 힘만 행사하거나 정세를 잘못 판단하면, 진정한 세계 평화는 올 수 없다. 따라서 미국 정부는 중동의 평화와 세계 질서를 위해 하루속히 책임 있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
대한민국도 한반도의 운명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국력을 더 키워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경제적 힘, 과학기술의 힘, 강력한 군사력, 그리고 치밀한 정치·외교적 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세계는 여전히 이념적 분열과 패권 경쟁, 지정학적 불확실성 속에 놓여 있다. 이를 극복하는 힘은 갈등이나 강압이 아니라, 상대를 향한 이해와 포용, 그리고 성숙한 국제적 책임감에서 나온다. 안으로는 이념을 넘어 서로를 감싸 안고, 밖으로는 실리 외교와 단단한 국력을 갖추어 나가는 동시에 포용의 자세가 필요하다. 평화와 안녕을 위해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올바른 선택을 소망하며, 그것이야말로 9.11 테러 25주년을 맞이하는 우리가 가슴 깊이 품어야 할 시대적 염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