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16일(현지시간) 소셜미디어를 통해 한ㆍ미 연합훈련 축소를 지시하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대화 의지를 밝힌 뒤 잇달아 ‘러브콜’을 보냈지만 북한은 한 달 넘게 직접적인 답을 내놓지 않고 있다. 대신 대외 메시지의 주체와 수위, 무력시위의 강도를 세밀하게 조절하며 북ㆍ미 대화의 조건과 의제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재설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지난 한 달(8월 19일~9월 20일) 북한이 내놓은 주요 대외 메시지는 모두 10건이다. 김정은의 실질적 대변인 역할을 하는 김여정 노동당 부장의 입장과 담화가 5건으로 절반이고, 외무성 3건, 국방성 2건이 뒤를 이었다. 본지가 이를 전수 분석한 결과 북한은 비핵화 요구 철회와 대북 적대시 정책 전환을 압박하는 동시에, 핵보유국 지위를 전제로 한 새로운 북ㆍ미 협상 구도를 만들기 위한 ‘다층적 담화전’을 펼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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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미 압박 선봉엔 김여정
가장 눈에 띄는 건 김여정의 등판 빈도다. 전체 메시지 10건 가운데 절반을 직접 내놓으며 선봉에 섰다. 대미ㆍ대남 정책의 핵심 인물이자 김정은의 ‘입’인 김여정을 전면에 내세워 트럼프의 대북 메시지에 사실상 김정은이 간접 대응하는 효과를 노렸다는 분석이다.
김여정은 지난달 19일 트럼프가 언급한 북ㆍ미 정상 간 소통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일”이라고 선을 그었고, 한ㆍ미 연합훈련 축소에도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고 일축했다. 정상 간 친분이나 일회성 유화 조치만으로 협상에 나서지는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셈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3월 26일 평양에서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과 양국 간 '친선 및 협조에 관한 조약'에 서명했다고 조선중앙TV가 27일 보도했다. 김여정 당 총무부장이 옆에서 보조하고 있다. 조선중앙TV 캡처, 연합뉴스
이달 들어서는 미국이 넘어야 할 문턱을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지난 18일 미국 주도의 각종 연합훈련을 일일이 거론하며 “적대성 신기록”이라고 비판했고, 19일에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대북 비핵화 촉구 결의를 “국가안전 최중대 사안”으로 규정하며 전면 거부했다. 김정은이 지난 2월 9차 당대회에서 제시한 ‘비핵화 의제 포기’와 ‘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를 북ㆍ미 대화 재개의 전제조건으로 다시 못 박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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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화 뒤엔 미사일…말과 행동 결합
최근 담화전은 말에 그치지 않고 실제 무력시위와 맞물리는 양상도 뚜렷하다. 7년 전 북ㆍ미 간 ‘비핵화 협상’의 틀에서 벗어나 고도화된 핵ㆍ미사일 능력을 배경으로 새로운 협상판을 만들려는 움직임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북한이 지난 12일 원산 일대에서 협동화력 습격훈련을 진행하는 모습.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김여정은 지난달 20일 북한이 단거리탄도미사일(SRBM) 10여 발을 기습 발사한 직후 담화를 내고 하반기 한ㆍ미 연합훈련인 을지자유의방패(UFS)가 “트럼프 말 한마디에 빈껍데기 연습이 됐다”고 주장했다. 이재명 대통령을 향해서도 “안팎이 다른 이중적 언행”이라고 실명 비난하며 연합훈련 축소를 둘러싼 한ㆍ미 간 온도 차를 파고들었다.
지난 18일 “반응행동”을 예고한 담화 역시 이틀 뒤인 20일 두 차례 탄도미사일 발사로 이어졌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북한이 7년 전에 비해 고도화된 핵ㆍ미사일 능력을 드러내는 것은 메시지의 강도를 극대화하면서 자국의 불가역적인 핵보유국 지위를 고착시키려는 전략적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019년 6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군사분계선 북측 지역에서 만나 인사한 뒤 남측 지역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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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라인’은 피하며 대화 불씨 유지
그러면서도 북한은 메시지와 무력시위의 수위를 정교하게 조절하고 있다. 사안에 따라 김여정뿐 아니라 외무성ㆍ국방성 대변인을 앞세우고, 기자와의 문답이나 대변인 입장 등 형식을 달리했다. 미국을 직접 자극할 표현은 상대적으로 자제했고 트럼프의 대화 제안도 명시적으로 거부하지 않았다. 협상 조건은 높이되 대화의 문 자체를 닫지는 않는 셈이다.
무력시위에서도 미국이 민감하게 받아들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 등 이른바 ‘레드라인’을 넘는 행동은 피하고 있다. 최근 미사일 발사를 김정은이 직접 참관하지 않는 것도 향후 대미 대화 가능성을 염두에 둔 수위 조절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결국 북한은 당장 트럼프의 대화 제안에 호응하기보다 상황을 관망하면서 높아진 전략적 위상을 지렛대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협상판을 짜려는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이 9차 당대회 개회사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더욱 힘 있게 다그쳐나가는 데 유리한 조건과 환경도 마련됐다”고 밝힌 정세 인식도 이런 자신감의 배경으로 꼽힌다.
오경섭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북한이 중ㆍ러와의 밀착을 통해 높아진 전략적 위상을 활용해 미국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는 모습”이라며 “당분간 북ㆍ미 대화의 조건을 높이면서 고도화된 핵ㆍ미사일 능력으로 존재감을 과시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