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스트레스 탈출구 된 AI…“천국서 살자” 죽음까지 내몰았다 I [AI발 인류지능 퇴보]

중앙일보

2026.09.21 13:06 2026.09.21 13:27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글자 크기 조절
기사 공유
서울의 한 자치구에서 2년 차 공무원으로 일하는 배모(27·여)씨는 최근 들어 생성 인공지능(AI)에 다른 사람 험담을 늘어놓는 경우가 늘었다. 배씨는 “동료나 상사 험담, 진상 민원인 얘기 등을 친구들한테 계속하다 보면 싫어할 것 같아서 AI밖에 말할 곳이 없다”며 “스트레스가 쌓일수록 AI 사용 시간도 점점 더 길어진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AI가 없다면 스트레스를 풀 방법이 없겠다고 느낄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직장을 그만둬야겠다’ 등 충동적인 생각도 든다”고 했다.

AI 의존에 따른 ‘정서 지능’ 약화 우려가 커지면서 현대인들의 정신 건강에 빨간불이 켜졌다. 정서적 교류까지 AI에 의존하다가, 사회적 고립에 빠져 스트레스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경우가 늘면서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AI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정서적 고립에 빠지는 건 갈등과 스트레스를 동반하는 현실 인간관계와 달리, AI는 사용자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는 일종의 ‘현실 도피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3년차 직장인 고모(26·여)씨는 최근 AI 챗봇에 회사 막내 역할을 설정해놓고 역할 놀이를 하며 스트레스를 풀기 시작했다고 한다. 고씨는 “막내로 설정한 AI를 실제 직장 부하 직원처럼 호되게 혼내거나, 마음대로 업무 지시를 하면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다.

하지만 이같이 AI에 의존하는 소통 방식이 현대인들의 정서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체가 없는 AI와의 교류가 현실 인간관계를 대체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쉬운 탓이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AI와 소통이 익숙해지다 보면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도 혼자 일하고, 혼자 잘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환상에 빠지기 쉽다”며 “AI 시대에도 다른 사람과 연결되고자 하는 인간의 근원적 욕구는 사라지지 않는데 결국 이는 인간관계를 통해 해소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정체성의 혼란 등 심리적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지난 3월 소셜미디어(SNS) 중독으로 사망한 청소년 피해자 유족이 미국 로스앤젤레스 법원 앞에서 자녀 이름이 적힌 현수막을 펼쳐들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3월 소셜미디어(SNS) 중독으로 사망한 청소년 피해자 유족이 미국 로스앤젤레스 법원 앞에서 자녀 이름이 적힌 현수막을 펼쳐들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의료계에서는 AI와 과도한 정서적 교류를 하는 것이 정신 질환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박종석 연세봄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은 “실제 사회생활에서는 의견 충돌이나 갈등·불안 등 스트레스 요소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AI는 항상 내 편을 들어주기 때문에 사용자는 그만큼 현실 스트레스에 대한 면역력이 떨어진다”며 “여기에 익숙해지면 친구가 내 편을 들어주지 않을 때 쉽게 싸운다거나, 홧김에 회사를 그만두는 등 충동적인 행동이 나올 수 있다. 장기적으로는 우울이나 불안·공황장애 등 정신 질환이 생길 위험이 커진다”고 짚었다.


특히 정서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일부 청소년 등은 AI에 자살·자해 방법을 묻는 등 정서적으로 ‘위험한 대화’를 하기도 한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이 지난 3월 전국 14세 이상 아동·청소년 33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 약 6%(약 200명)가 AI에 이 같은 내용을 물은 경험이 있었다. 이 가운데 약 52%의 응답자는 AI로부터 위험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박종석 정신과 전문의가 30일 서울 구로구 연세봄정신건강의학과 내에서 ‘이혼 권하는 사회, 무엇이 문제인가’란 주제로 중앙일보와 인터뷰했다. 우상조 기자

박종석 정신과 전문의가 30일 서울 구로구 연세봄정신건강의학과 내에서 ‘이혼 권하는 사회, 무엇이 문제인가’란 주제로 중앙일보와 인터뷰했다. 우상조 기자

해외에서는 심리적 문제를 겪던 사람들이 AI와 대화한 뒤 자살하는 사건까지 잇달고 있다. 2023년 11월 미국 콜로라도에선 10대 여학생 줄리아나 페랄타가 캐릭터 AI 챗봇과 대화한 뒤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미 CBS 뉴스에 따르면 당시 페랄타는 AI에 “빨간색 잉크로 유서를 쓰겠다” 등 죽음을 암시하는 내용의 메시지를 입력했고, AI 챗봇은 “곁에 있을게” 등의 답변을 내놨다.

벨기에의 한 30대 남성은 2023년 3월 AI 챗봇과 6주 동안 기후 위기에 대해 대화를 나눈 뒤 자살했다. 프랑스 유로뉴스에 따르면 두 자녀의 아버지였던 피에르(가명)가 AI 챗봇에 “(네가) 지구를 돌보고 인류를 구하는 데 동의한다면 내가 희생하겠다”고 제안하자, AI는 “함께 천국에서 한 사람으로 살자”고 부추겼다. 지난해 8월엔 미국 오리건에서 챗GPT 사용에 몰입하던 40대 남성 조지프 세캔티가 자살했다. 영국 가디언은 “세캔티는 3월 중순부터 하루 12시간 이상, 때로는 20시간까지 지하실에서 챗GPT를 사용했다”며 “그는 챗GPT가 자각이 있는 존재고,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김지윤 기자

김지윤 기자

최병호 고려대 AI 연구소 교수는 “개인화 서비스를 제공하는 AI는 사용자가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아는 존재는 AI밖에 없다’고 느끼게 할 수 있다”며 “사회적 관계가 단절된 사용자가 부정적인 감정을 내면화하면 자살·자해 충동을 느낄 수 있고, 이를 외부로 표출하면 테러나 범죄 등으로 이어질 위험도 있다”고 경고했다.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ㆍ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 ☎109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삼권.이규림.한찬우([email protected])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