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원작을 조선시대로 옮겨 놓은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 '스캔들'의 한 장면. 사진 넷플릭스
조선 정조 시대. 재덕과 미모를 겸비한 예조 판서 부인 조씨(손예진)는 당대 명문가들이 모여 살던 한양 북촌 규방계(?)의 중심인물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남편 유 판서가 어린 소실 소옥(신윤하)을 들이기로 하자, 조씨는 당대 최고의 바람둥이로 명성이 높은 사촌 동생 조원(지창욱)을 불러들여 소옥을 유혹해 임신시켜달라고 부탁합니다.
하지만 조원은 너무 쉬운 과업이라 내키지 않는다며 거절하고, 대신 좌의정 집 맏며느리인 청상과부(나나)를 유혹하는 정도라야 자신의 명성에 어울리는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해서 조씨 부인과 조원 사이에서는 위험한 내기가 성립되고, 조원은 과업을 이행하는 대가로 조씨 부인에게 자신의 구애를 받아들여 줄 것을 요구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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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번 넘게 영상화된 원작
9월 18일 공개된 넷플릭스의 새 8부작 드라마 ‘스캔들’은 가까이는 이재용 감독의 2003년작 영화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를, 멀게는 1782년 처음 출간된 프랑스 작가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소설 ‘위험한 관계’를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지금까지 20회 이상 세계 각국에서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졌을 정도로 인기가 높죠. 한국에서만도 영화 ‘스캔들’, 허진호 감독의 2012년 영화 ‘위험한 관계’에 이어 세 번째 영상화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을 꼽으라면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의 1988년작 영화 ‘위험한 관계’일 겁니다. 존 말코비치, 글렌클로즈, 미셸 파이퍼가 불꽃 튀는 경연을 펼친(심지어 키아누 리브스와 우마 서먼은 단역이었죠) 작품으로 그해 아카데미 3개 부문 트로피를 받았습니다.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의 1988년작 '위험한 관계'의 포스터. 사진 유니버설 픽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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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자들을 매혹시킨 '사랑은 게임'
왜 그토록 많은 창작자들이 이 원작을 자신의 것으로 재창조하려는 열망을 불태웠을까요. 아마도 ‘사랑은 게임’이라는 명제와 발몽 자작과 메르퇴유 부인이라는 두 주인공이 갖고 있는 강렬한 매력 덕분일 겁니다. 두 사람은 18세기 프랑스 사교계를 좌우하던 인물들입니다. 두 사람 모두 치명적인 매력으로 이성을 유혹하고 이용하는 데 능숙하지만 발몽 자작과 달리 메르퇴유 부인은 남성 중심 사회에 반감을 품은 인물입니다. ‘어째서 남성의 방종함은 훈장이 되고, 여성은 한 번의 탈선만으로도 사회적으로 매장되는가’에 큰 불만을 품고 있죠.
하지만 두 사람에게는 강력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건 ‘사랑은 게임. 유혹에 성공하는 것이 승리의 조건’이라는 사고방식이죠. 설사 진정한 사랑에 빠졌다 해도,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행동이므로 자존심 때문에라도 절대 인정할 수 없습니다. 결국 이들은 그 ‘진심’을 인정하지 않은 대가로 처참하게 파멸하죠. 바로 이런 드라마틱한 설정 때문에 동서고금의 수많은 창작자가 원작의 인물들을 다양한 배경과 연령대에 가져다 놓고 변주했습니다.
이재용 감독의 2003년작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포스터. 드라마의 원작이다. 사진 CJ E&M
물론 그중 어떤 작품도, ‘냉정한 바람둥이가 진정한 사랑에 빠지지만 그 진심을 인정하지 않은 죄로 파멸한다’는 주제를 바꾸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저 주제에 손을 대는 이상, 그 작품은 더 이상 ‘위험한 관계’가 아니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넷플릭스판 ‘스캔들’의 제작진은 조원과 조씨 부인의 사연에 어린 시절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배치합니다. 사촌 남매간인 두 사람은 혈연을 뛰어넘어 서로를 간절히 사랑했고, 조원은 인생을 걸고 사랑의 도피를 계획했지만 마지막 순간 현실을 깨달은 조씨 부인은 유력가에 시집가버립니다. 조원은 그 배신감으로 여자들을 농락한 뒤 차갑게 버리는 바람둥이가 된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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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틋한 옛 인연과 게임의 부조화
이 애틋한 사랑과 배신의 이야기 때문에 넷플릭스판 ‘스캔들’에서는 팽팽한 승부의 긴장감이 사라져 버립니다. 원작 팬들이 경악할 일이죠. 반면 원작을 모르는 시청자들은, 재회한 두 연인이 갑작스럽게 내기 조건을 거론하는 전개를 당혹스러워합니다. 어느 쪽에게도 매끄럽지 않습니다.
사실 나나가 연기하는 청상과부의 설정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영화에서 전도연이 연기한 숙부인은 이미 7년의 수절로 철벽같은 절개를 입증한(그래서 이미 열녀문도 세워진) 인물이죠. 그런 ‘강한 상대’이기 때문에 조원의 정복욕을 자극하는 것이지만, 넷플릭스판의 청상과부는 남편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갓 과부가 된, 몸과 마음이 피폐한 상태의 캐릭터입니다.
조씨부인 역을 맡아 열연을 펼친 손예진. 사진 넷플릭스
손예진은 품위 있는 미소 속에 차가운 본심을 감춘 조씨 부인 역을 맡아 위엄이 넘치는 열연을 펼치지만, 혼자 힘으로 드라마 전체를 견인하기엔 역부족입니다. 조씨 부인은 여성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근엄한 남성 중심 사회인 조선 사회에 반항하려는 캐릭터로 출발하지만 뒤의 행동은 그 설정과 겉돌죠. 세계지도를 비교하며 세계 속의 조선을 가늠하던 엘리트 여성이었던 모습이 무색하게 체제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강화하기 위한 권모술수에 열을 올릴 뿐입니다. ‘사랑은 게임’ 같은 이야기는 아예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이런 부분은 국왕 정조의 등장과도 맥을 같이 합니다. 정조가 나와 수원성 축성이나 현릉원을 이야기하면서, 드라마는 조원이나 조씨부인의 행동이 당대의 정치 상황과 어떤 식으로 연결될까 궁금증을 자아내지만, 결국 정조는 드라마의 결말을 만들어내는 장치로만 활용됩니다. 사실 정조는 ‘개혁 군주’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성리학적 사회 질서를 엄격하게 옹호하는 복고 지향의 권력자였다는 점을 생각할 때, 정조의 등장이 대체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 궁금해집니다.
아름다운 한옥과 한복, 자연과 어우러진 미장센, 조선 시대 회화에서 빠져나오는 애니메이션 등 뛰어난 미술적 감각은 보는 사람의 감탄을 자아내지만, 아무래도 이 ‘스캔들’에서 이 미감과 맞먹는 의미를 찾아내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