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국제사법재판소(ICC) 건물의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인류의 양심’이 존망의 위기에 처했다. ‘제노사이드(집단학살)’ ‘전쟁 범죄’ 같은 만행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세계 각국이 모여 만든 국제형사재판소(ICC)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조직적 해체 시도에 휘청이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ICC의 금융 거래를 차단하는 제재를 준비 중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제재는 통신 서비스 정도를 제외하곤 ICC와의 거래 대부분을 금지하는데, 특히 달러 거래가 차단돼 재판소 운영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다. 미국은 이미 일본 국적의 아카네 도모코 ICC 소장을 비롯한 ICC 인사들을 잇따라 제재 대상으로 지정해왔다. 하지만 추가로 이뤄지는 제재는 ICC 조직 전체를 겨냥해 더 강력하다.
아카네 도모코 국제형사재판소(ICC) 소장이 지난 2024년 11월 네덜란드 헤이그 ICC 법정에 들어서고 있다. AP=연합뉴스
이미 ICC는 일상 업무가 어려운 상황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마이크로소프트(MS)와의 협력이 중단될 것을 우려한 ICC가 MS오피스 대신 독일산 오픈소스 운영체제로 교체해 업무 차질을 빚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과 ICC의 악연은 깊다. 2002년 ICC 설립 당시 미국은 회원국으로 가입하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을 치르던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미군이 수사받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1기 집권 시절인 2020년 ICC가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의 전쟁범죄 관련 수사를 벌이려 하자 ICC 관계자를 제재했다.
지난달 7일 미국 국무부에서 열린 미 광물산업 관련 토론회에 참석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왼쪽)과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 AP=연합뉴스
집권 2기에도 ICC가 2024년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에 체포 영장을 발부한 것을 명분 삼아 “ICC는 반(反)미, 반이스라엘 성향을 지닌 국제기구”라고 비판하며 ICC 해체를 공언했다.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지난 7월 WSJ에 “ICC가 미국인에게 가하는 위협을 막기 위해 동맹국과 협력해 벽돌 하나하나 떼어 내듯 ICC를 해체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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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론 시달려…‘국제백인재판소’ 조롱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과 우나긴 쿠렐수크 몽골 대통령이 지난 2024년 9월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열린 공식 환영식에 참석하고 있다. 타스통신 캡처
이번 위기는 ICC의 근본적 한계를 드러냈다는 분석이 나온다. ICC 설립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 같은 참극이 반복되는 걸 막기 위해 1948년 유엔 총회에서 의논을 시작했다.
냉전 시절 논의가 지지부진하다 1990년대 르완다, 보스니아 등에서 발생한 집단학살을 계기로 급진전했다. 1998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160개국이 ICC 설립 내용을 담은 ‘로마 규정’에 합의한 뒤 2002년 ICC가 출범했다. 집단살해, 반인도범죄 등을 특정 국가가 스스로 수사하고 처벌할 의사나 능력이 없을 때 ICC가 대신하기로 했다.
하지만 설립 후 무용론에 시달렸다. ICC는 자체 경찰력을 포함한 체포 수단이 없다. 피의자의 신병을 확보하고 형을 집행하려면 회원국 정부의 협조가 필수적이란 얘기다. 미국·중국·러시아·인도·이스라엘 등 주요국은 ICC에 가입하지 않아 협조 의무가 없다.
지난해 4월 헝가리를 방문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오른쪽)이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한국을 비롯한 125곳의 회원국에서라도 ICC의 사법권이 통해야 하는데 이들도 자국 이익에 따라 ICC가 수사하는 인물의 신병 확보에 나서지 않을 때가 많다. ICC에 체포 영장이 발부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네타냐후가 지난 2024년 몽골, 지난해 헝가리에 각각 방문했지만, 체포되기는커녕 의장대 사열 등으로 환대를 받았다.
이에 ICC는 국제적 영향력이 크지 않은 아프리카 독재자나 무장단체 지도자만 체포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실제 지난 24년간 ICC가 전쟁 범죄 등으로 유죄를 선고한 9명 모두 아프리카 출신이었다. “ICC의 원래 뜻은 국제백인재판소”란 조롱(야히아 자메 전 감비아 대통령)까지 나왔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필리핀 대통령이 지난 16일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형사재판소에 출석해 재판을 받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해 3월 ‘마약과의 전쟁’ 과정에서 초법적 처형을 지시한 혐의를 받는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필리핀 대통령을 체포했지만, 이는 그의 정적(政敵)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의 협조 때문이란 평가가 나온다.
회원국 이탈 움직임도 일고 있다. 올해 들어서만 아프리카의 부르키나파소, 말리, 니제르, 차드는 물론 남미 베네수엘라 등이 탈퇴 의사를 밝혔거나 절차를 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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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이란전쟁으로 기소될까 ICC 해체?
지난 16일 이란 테헤란의 한 대형 광고판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마술사의 상자 안에 갇힌 모습을 그린 반미 선전 그림이 걸려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ICC가 해체 위기로 내몰린 결정적 계기는 2023년 푸틴, 2024년 네타냐후 체포영장 발부다. 회원국 영토 내 비회원국(러시아·이스라엘)의 범죄 행위로 수사 대상을 확대하며 벌인 이 행위가 미국 등 강대국을 자극했다.
트럼프의 ICC 해체 시도 배경엔 이란전쟁을 일으킨 자신에 대한 ICC의 수사 및 기소를 막기 위한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로이터통신은 “(전쟁 과정의) 미군 책임을 트럼프 행정부에 묻는 시도를 차단하려는 의도도 있다”고 분석했다.
ICC가 그나마 믿을 건 연간 1억9755만 유로(약 3071억원)의 예산 대부분을 지원하는 유럽과 일본 등이다. 이들의 지지는 아직 굳건하지만, 향후는 불투명하다. 유럽에선 국제기구 탈퇴를 주장하는 극우 세력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자국민이 ICC 소장인 일본도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생각하며 소극적 태도를 보이는 중이다.
카일 리드 암스테르담대 교수는 최근 국제형사법학술지(JICJ)에 “ICC 회원국의 지지 표명만으론 해결하기 어렵다”며 “회원국 간 법률 및 외교 공동 대응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