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모금 마신 물이 식도 중간에 얹혀 넘어가질 않는다. 그 체증이 가슴 통증으로 이어진다. 며칠째 겪는 증세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한 편 때문이다. 마음 한쪽에 웅크리고 있던 영상이 현실의 한 단면처럼 불쑥 들고일어나 일상의 행동과 생각을 멈추게 한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2002년 영화 ‘피아니스트’. 실존 인물인 폴란드계 유대인 피아니스트 브와디스와프 스필만의 생존기다. 감정이입이 심해 체화가 되었는지 영화의 많은 장면이 파편처럼 뇌리에 박혀 좀처럼 떠나지 않는다. 전쟁의 참상을 잔인하리만큼 건조하고 절제된 영상으로 보여주는 영화. 스펙터클한 대하(大河)가 아니라 한 인간의 생존을 통해 예술이 인간을 살리는가, 인간이 예술을 살리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하는 영화.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스필만 가족은 바르샤바 게토로 내몰린다. 1942년, 가족과 함께 죽음의 수용소로 이송 도중 그를 알아본 유대인 경찰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남는다. 이후 몇몇 지인의 도움으로 여러 은신처를 전전하다 바르샤바 폐가에 홀로 숨어든다. 인기척이 날까 봐 피아노 건반에서 한 뼘이나 떨어진 허공에서 연주하는 손가락이 쓸쓸하고, 물 공급이 끊긴 수도꼭지를 여는 장면이 슬프다. 먹을 것을 찾아 헤매다 오이 피클 통조림을 발견하지만 독일군 장교 호젠펠트에게 발각되는 순간, 숨이 멎는다.
장교의 지시로 피아노 앞에 앉은 스필만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쇼팽의 발라드 1번을 연주하는 그의 옆모습이 서럽다. 코와 입에서 새 나오는 입김이 하얗고,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온 햇살이 그의 콧등에서 내려와 피부 막을 반투명으로 비춘다.
장교는 그를 숨겨주고 빵과 잼을 가져다준다. 잼을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는 그 동작이 목메게 한다. 사람이 죽는 장면보다 먹는 장면이 더욱 아프다.
삶의 본질은 죽이는 것과 먹는 것에 있다고 조셉 캠벨은 말했다. 삶은 죽여서 먹음으로써, 남을 죽이고 자신을 달처럼 거듭나게 함으로써, 살아지는 것이라는 게 그의 통찰이다. 맞다, 사는 일은 먹는 일이다. 먹지 못하면 쇼팽도 예술도 없다.
무서우리만치 참혹한 고독이라니. 생명이 없는 거리에 홀로 선 모습이라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 같은, 살아있음으로인해 겪는 불안과 그 극한의 공포라니.
그런데도 영화는 아름답다. 김병익 문학평론가는 "아름다움이란 그 대상 자체보다 대상을 바라보는 인식에서 피어난다"고 했다. 사람들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스필만을 도운 이유는 그가 재능 있는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이다. 내게는 한 예술가뿐 아니라 그가 품고 있는 예술까지 보호하고자 하는 은유로 닿아왔다. 그렇다, 고통스러운 홀로코스트 영화가 아름답다고 느낀 이유는 예술의 가치가 옹호 받는다는 인상 때문이었다. 사는 일은 먹는 일이다. 감사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예술을 하는 마음으로, 먹고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