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생 최성식 폴리페놀팩토리(대표 이해신) CFO 겸 경영지원본부장이 2024년 8월 대전 KAIST의 스타트업에 합류하며 처음 만든 명함에 적은 직함이다. 그 명함을 1년여간 썼다. 삼성그룹 공채로 입사해 삼성생명과 삼성자산운용에서 35년을 일했고, 펀드매니저와 ETF 운용본부 수석을 거쳐 홍콩법인장·상하이대표처 수석대표·베이징법인장까지 지낸 사람의 명함치고는 낯선 직함이었다.
“스타트업의 CFO는 재무만 하는게 아니고, 인사, 노무, 법무, 이사회, 주주 업무까지 안 하는 게 거의없습니다. 오랜 경력이 있지만, 모르는 일이 있으면 인턴처럼 처음부터 배워야 했고, 그 마음가짐을 명함에 그대로 담고 싶었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회사 구성원 20~30대 과학자들입니다. ‘전무’나 ‘CFO’라는 직함이 먼저 들어가면 말을 걸기 어렵겠다 싶었어요. 소통의 격실을 낮추고 싶었습니다.”
정년퇴직 후 11개월, “시간이 생겼는데 쓸 줄을 몰랐다” 퇴직 직후부터 재취업을 준비한 것은 아니었다. 35년 동안 미뤄뒀던 집안일을 돌보고, 친구들과 당구를 치고, 해외여행도 다녀왔다. 처음에는 오랜 직장생활 끝에 주어진 휴식을 즐겼다. 시간이 흐르자 의외의 고민이 생겼다.
“제가 평생 놀 줄 모르고 살았더라고요. 막상 시간이 많이 생기니까 이 많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잘 모르겠는 겁니다.”
일을 중심으로 살아온 사람에게 갑자기 생긴 긴 자유시간은 생각보다 낯설었다. 몇 달을 보내면서 ‘아직 일을 할 수 있는데 다시 한번 해보면 어떨까’라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겼다. 마침 지인의 소개로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한 폴리페놀 팩토리를 알게 됐다. 그렇게 2024년 8월, 11개월의 공백을 끝내고 다시 출근했다.
‘인턴 CFO’의 두 번째 출근은 새벽 5시에 시작됐다 ‘인턴 CFO’ 명함을 쓰던 약 1년 동안 그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났다. 첫차를 타고 대전 KAIST에 있는 회사로 출근하기 위해서였다. 해외 법인장까지 지낸 35년 경력의 베테랑이었지만, 스타트업에서는 자신 역시 다시 배워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명함의 ‘인턴’은 겸손의 수사가 아니라 실제 시간표였다. 인턴 기간 1년과 첫차 통근 1년이 겹친다.
폴리페놀 팩토리는 그가 익숙했던 대기업과 정반대에 가까웠다. 대기업에는 오랜 시간 축적된 시스템과 역할이 있다. 스타트업에서는 회사가 성장하는 속도에 맞춰 제도와 조직을 동시에 만들어야 한다. 취업규칙과 급여체계, 이사회 운영, 주주 관리, 계약 검토까지 ‘담당자’가 없는 일을 그가 하나씩 익히며 세웠다. 필요한 것은 35년의 경험을 그대로 가져오는 일이 아니라, 그 경험을 새로운 환경에 맞게 다시 번역하는 능력이었다.
“대기업 법인장을 했다고 스타트업 인사·노무를 아는 건 아닙니다.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하고, 젊은 직원한테도 물어봤습니다. 인턴 명함이 그걸 쉽게 해줬어요.”
해외 법인장 출신 CFO의 현재 별명은 ‘최반장’ 회사에서 그의 직함은 전무지만 스스로는 ‘최반장’이라는 호칭을 즐겨 쓴다. 스타트업에는 담당자가 정해지기 전에 먼저 해결해야 하는 일이 수없이 생기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건 제 일이 아닌데요’라고 하기 시작하면 일이 멈춥니다. 필요하면 제가 하면 되죠.”
그래서 회사에는 조금 특이한 일화도 생겼다. 사무실 도어락 건전지가 다 돼 불편하던 어느 날, 누군가 말없이 새 건전지로 교체해 놓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최 전무였다. 직원들에게 손편지를 남기기도 한다. 직원들은 그 편지를 버리지 않고 사무실 한쪽에 붙여두었다.
도어락 건전지를 가는 것이 CFO의 본업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가 ‘최반장’이라는 별명을 좋아하는 이유는 조직에 필요한 일이 보일 때 직급이나 업무영역부터 따지지 않겠다는 태도에 가깝다. 젊은 직원들이 앞을 보고 달릴 때 누군가는 현금흐름과 계약을 살펴야 하고, 조직이 커지는 만큼 사람과 비용과 제도를 갖춰야 한다. 그 지점에서 그의 35년 경험이 다시 쓰인다.
60대와 2030이 함께 일하는 법 폴리페놀팩토리에서 그는 최고령 구성원이다. 하지만 젊은 직원들과 어울리기 위해 젊은 세대의 말투나 문화를 일부러 따라 하지는 않는다. 모르는 것은 묻고, 좋은 아이디어는 직급과 나이를 따지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그의 방식이다. 1년간의 ‘인턴 CFO’ 명함은 그 방식의 첫 번째 선언이었다.
2024년 사내 할로윈 행사에서는 초록색 반짝이 의상과 빨간 입술로 만화 캐릭터 ‘마이콜’로 등장했다. 평소 예산과 계약과 숫자를 이야기하던 CFO의 변신에 젊은 직원들의 반응이 컸다.
(사진 아랫쪽) 24년 입사 첫 해, 사내 할로윈 파티에서 마이콜로 분장한 최성식 CFO (사진제공=폴리페놀팩토리)
“대기업에서 오래 있다 보면 저도 모르게 근엄한 울타리가 생겼던 것 같습니다. 그날은 제가 먼저 그걸 한번 허물어본 거죠.”
그가 생각하는 세대 소통은 젊은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경험과 직급을 앞세우지 않고 먼저 권위를 내려놓는 것이다. 오랜 경험을 젊은 사람을 통제하는 데 쓰는 대신, 젊은 구성원들이 더 과감하게 일할 수 있도록 조직의 안전장치를 만드는 것이 시니어의 역할이라고 본다.
“인생 2막이라는 표현을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정년퇴직 후 다시 스타트업에 들어간 사람에게 흔히 ‘인생 2막’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는 그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60세가 됐다고 갑자기 다른 인생이 시작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굳이 몇 막인지 나눌 필요가 있을까요.”
그가 스타트업에 들어와 가장 경계하게 된 것은 뜻밖에도 자신의 ‘경험’이었다.
“경험은 분명 자산입니다. 그런데 과거의 성공 방식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드는 순간, 경험은 부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대기업에서의 정답이 스타트업에서도 정답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래서 그는 AI를 배우고, 새로운 사업을 공부하고, 자신보다 수십 년 어린 직원들의 일하는 방식도 다시 들여다본다. 그가 생각하는 60대의 경쟁력은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쌓은 경험 가운데 무엇을 계속 가져가고 무엇을 과감하게 버릴지 판단하는 능력에 가깝다.
“나이가 들어서 새로운 일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익숙한 것만 고집하기 시작할 때 사람이 늙는 것 같습니다.” 퇴직 직후에는 갑자기 많아진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랐던 그는, 지금 다시 매일 출근한다. 명함의 ‘인턴’은 1년 만에 뗐지만 마음가짐은 그대로다. 과거의 직함과 성공 경험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35년 동안 축적한 경험을 작은 스타트업의 오늘에 맞게 다시 사용하는 중이다.
한편, 폴리페놀팩토리는 이해신 KAIST 화학과 석좌교수가 만든 교원회사로 '그래비티샴푸'를 만들고 있는 회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