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에서 열린 ‘버추얼 태권도’ 경기 모습. VR 헤드셋 등을 착용한 두 선수의 발이 허공을 가르면 동작 추적 감지에 따라 뒤편 대형 스크린 속 아바타들이 철권처럼 대신 싸운다. AP=연합뉴스
사각 매트 위, 태권도 도복을 갖춰 입은 두 선수가 3m 거리를 두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서 있다. 양 손에 컨트롤러를 쥐고, 눈을 완전히 가린 VR(가상현실) 헤드셋 그리고 가슴과 다리 등에 부착한 5개의 모션 센서가 부착돼 있다.
신체 접촉은 없다. 내뻗은 주먹과 발이 허공을 가르면 동작 추적 감지에 따라, 뒤편 대형 스크린 속 3D 아바타들이 대전 격투 게임 ‘철권’처럼 대신 싸운다. 상대 체력 게이지를 완전히 소진시키거나 남은 게이지가 많은자가 승리하는 3전 2승제 방식도 게임과 똑같다.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버추얼 태권도’의 경기 장면이다.
나이(17~35세)와 성별, 체급의 구분이나 제한도 없다. 16명이 혼성으로 개인전 토너먼트를 벌인다. 헤비급 남성과 플라이급 여성이 동일한 조건에서 맞붙는다.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버추얼 태권도’ 행사. AP=연합뉴스
가상(버추얼 태권도)과 현실(겨루기 58㎏급)을 넘나들며 두 종목 모두 출전하는 안향식(용인대)은 버추얼 태권도에 대해 “한 라운드당 경기 시간이 정식 겨루기(2분)의 절반인 1분에 불과해 끊임없이 공격해야 한다. 몸통보다 머리를 타격하면 상대 게이지가 더 많이 깎인다”고 말했다. 이어 “발이 빠른 경량급이나 유연성이 좋은 여자 선수들이 오히려 유리할 수 있다”고 덧붙여 타격보다 속도가 승패를 가른다고 귀띔했다. 싱가포르 IT 기업이 해당 플랫폼을 개발한 까닭에 테스트 과정에 자주 참여하며 경기 방식에 익숙해진 싱가포르 선수들이 강세다.
2024 KTA 버추얼태권도 국가대표 최종선발전 경기 모습. 사진 대한태권도협회 유튜브 캡처
그러나 타격이 상대 선수에게 직접 전달되지 않고, 아바타의 게이지만 깎일 뿐이다. 상대 빈틈을 파고드는 무도 특유의 복잡하고 치열한 수 싸움 대신 센서 판정과 득점에 유리한 앞차기 위주의 단조로운 공격이 이어진다. 호주의 겨루기 선수 사프완 칼릴은 뉴욕타임스에 “기존 태권도와 닮은 점이 거의 없다. 기술·전략적 부분은 사라지고 그저 가능한 한 발을 많이 뻗는 게 전부”라 꼬집었다.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버추얼 태권도’ 행사. AP=연합뉴스
격투 게임 속에 들어온 듯 화려한 중계 화면과 현장 관중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 사이의 괴리감 또한 새 종목의 호감도를 낮추는 요인이다. 두 선수가 디지털 장비를 칭칭 감은 채 각자 허공에 발을 뻗는 낯선 장면에 대해 일부 네티즌들은 “신체 접촉 없는 격투를 스포츠라 부를 수 있나”, “태권도가 무덤에서 돌아누울 노릇” 등의 냉소를 쏟아낸다.
일각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세계태권도연맹(WT)이 파격적인 시도를 이어가는 배경에는 절박한 생존 전략이 깔려 있다. 올림픽을 비롯한 국제종합대회에서 뻔하고 지루한 종목들의 입지가 나날이 좁아지는 현실을 감안할 때 비디오 게임과 숏폼에 익숙한 젊은 세대의 취향에 맞춰 변화를 추구한 거다.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버추얼 태권도’ 행사. AP=연합뉴스
조정원 WT 총재는 “버추얼 태권도는 무도로서의 태권도를 계승하는 종목이 아니다. 태권도의 기술과 정신은 지키되, 첨단 기술을 접목해 새로운 경쟁을 창출하려는 시도”라고 강조했다. 옹호론자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싸우는 종합격투기(UFC)와 달리 부상의 위험을 완전히 제거한 버추얼 태권도야말로 변화하는 시대 흐름에 부합한 신개념 종목”이라 주장한다.
e스포츠와 올림픽 종목 전문가 앤디 미아 영국 솔퍼드대 교수는 “(버추얼 태권도는) 젊은 세대를 게임에 빼앗길까 우려하는 스포츠 단체에 일종의 절충안으로 주목할 만하다”면서도 “아직까진 게이머들과 태권도 관계자 중 어느 쪽에서도 확고한 지지를 받지 못하는 ‘기묘한 경계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짚었다.
버추얼 태권도는 ‘디지털 시대 스포츠 혁신’과 ‘무도의 전통성을 훼손하는 기형적 종목’의 중간 어디쯤에 자리잡고 있다. ‘스포츠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