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폭동 상처에 희망 주려 추진 병역 문제에 막힐 뻔한 미국행 사흘만의 국제전화, 길이 열렸다 청와대·정부·한양대의 도움 커 “친아들처럼” 어머니 간절 부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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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송 한미문화교류재단 회장
박찬호가 다저스 유니폼을 들고 이영송 회장(왼쪽), 피터 오말리 구단주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영송 제공]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이자, 또다시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그 구단(애슬레틱스) 주주가 된 박찬호(53).
32년 전 그가 강속구를 던지는 한양대 투수였을 때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이다. 그 첫걸음 역시 한 청년의 재능과 도전만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군 미필의 대학생을 태평양 건너 메이저리그에 세우기 위해선 수많은 사람이 움직여야 했다.
그렇게 열린 문을 박찬호는 통과했다. 그리고 이제 메이저리그 구단의 주주가 되어 다음 세대 한국 선수들에게 또 다른 문을 열려고 한다.
한 송이 꽃 뒤엔 보이지 않는 계절의 축적이 있는 법.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서 꽃피기까지도 그를 위해 움직인 수많은 사람의 시간이 있었다.
이영송(83) 한미문화교류재단 회장은 그 계절을 함께 건넌 사람이다. LA 폭동으로 상처 입은 한인사회에 박찬호가 희망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그는 다저스 구단주 피터 오말리(88)와의 만남을 시작으로 한국에서 청와대와 정부 관계자들을 찾아다녔다. 그에게 32년 전 박찬호의 메이저리그행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봤다.
인터뷰 도중 과거 앨범을 꺼내보이는 이영송 회장. 김여진 인턴기자
-무슨 계기로 박찬호의 다저스행을 도왔나.
“1992년 4.29 폭동이 계기였다. 한인타운에선 생기가 달아났고 분위기는 침체됐다. 뭔가 동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고민이 이어지던 93년 6월 LA 다저스 구단주 오말리와 점심을 하게 됐다. 그가 2년 전 LA에서 열린 아마추어 대회에 한국 청소년 대표팀으로 참가한 박찬호를 눈여겨 봤다고 했다. 우연히 지나가던 스티브 김 LA 한인상공회의소 이사가 찬호를 안다고 하더라. 나는 그를 투수로 쓰겠는가 물어봤다. 오말리는 ‘OK, I will’이라고 대답했다. 한국 선수가 미국에서 활약한다면 한인의 사기 진작을 위해선 더 할 나위 없을 거라 생각했다. 오말리가 3개월 뒤 한국에 출장간다고 하길래 그 자리에서 함께 가겠다고 약속했다. 한국의 인맥으로 쉽게 성사될 줄 알았다. 9월 그와 같은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갔다.”
-쉽게 진행되진 않았을텐데.
“당시 찬호는 병역을 마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움직였다. 김영삼 정부와 연이 깊어 곧장 청와대를 찾았다. 나는 1992년 LA민주산악회에서 활동하면서 YS의 미주 후원회장을 맡은 인연이 있다. 친하게 지내던 홍인길(83) 총무수석을 만났으나 ‘말도 꺼내지 말라’고 하더라. 문민정부가 출범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병역 특혜를 준다면 민심이 크게 동요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대통령도 그런 원칙엔 철저한 분이라고 알고는 있었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청와대에서 안된다고 하면 다른 방법이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일정을 앞당겨 LA로 돌아오기로 했다. 떠나기 전 알고 지내던 박태권(76) 문체부 차관에게 안부 전화를 했다. 그가 만나자고 한사코 얘기하길래 결국 점심을 같이 했다. 그에게 박찬호의 사연을 얘기했더니 ‘방법을 알아보겠다’고 하더라. 그때는 반신반의했다. 청와대도 안된다고 한 일인데… 오말리에게는 호언장담하던 내 모습이 부끄러워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 뒤엔 어떻게 진전됐나.
“포기 상태에서 LA로 돌아왔는데, 사흘만에 박 차관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 박사님, 물건 구했습니다.’ 박찬호 문제를 풀었다는 뜻이었다. 곧장 다시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박 차관이 병무를 담당하던 친한 관료에게 한인사회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설득했고, 결국 해결 방법을 찾아냈다고 들었다.”
-병역 문제로 다 해결됐나.
“아니다. 소속 팀 한양대의 동의를 구해야 했다. 한양대는 찬호가 고교 시절부터 장학금을 지원했다. 나름 투자한 셈인데 그냥 놔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다시 홍 수석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홍 수석이 내가 보는 자리에서 김종량(76) 한양대 총장과 통화했다. ‘지난해 봄에 폭동으로 LA 동포들이 온통 초상집 분위기라는데 여기서 운동선수를 한 명 세우면 다시 살아날 것 같다고 합니다. 걔 이름이 박찬호랍니다.’
가까운 이에게 툭 던지는 듯한 허 수석 특유의 말투로 길게 말하지도 않았다. 30초도 안 걸렸다. 그러곤 홍 수석이 내게 ‘됐어요’라고 했다. 홍 수석이 교통정리를 즉석에서 해줘 찬호의 미국행을 성사시켜준 것이다. 어떻게 그리 쉽게 풀었냐고 묻자 ‘정부기관과 사립대학들도 관계가 깊습니다’고만 하더라. 동포사회를 위한 일이라는 내 말을 믿고 선뜻 도와준 그에게 늘 고맙게 생각한다. 그 뒤엔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됐다.”
-박 선수 가족과도 만나봤나.
“그 해 12월 말 찬호의 출국을 돕기 위해 다시 한국에 갔다. 출국일 아침 찬호의 부모님이 호텔로 찾아왔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감사 인사를 한 뒤 ‘미국에 가면 친아들처럼 생각하고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포대자루 하나도 건네주셨는데 문중 산에서 직접 따온 밤이 잔뜩 들어 있었다. 잘 여문 밤이었으나, 반입이 힘들 것 같아 인사 차 호텔을 찾은 누님께 선물했다.”
-부모님 부탁대로 미국에 온 뒤에도 자주 챙겼나.
“그러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당시 치과 운영, 부동산 투자 등으로 가장 바쁘던 시기였다. 찬호가 미국에 온 초반 몇 달 후원회장을 맡았다 스티브 김에게 넘겨줬다. 이후 찬호에게 연락이 오거나 하지는 않아 개인적으로 만날 기회는 거의 없었다. 사실 연락 한 통 없어 마음 한 켠으로 잠시나마 섭섭했다. 하지만 스티브가 매니저로 모든 걸 챙긴다고 해 굳이 내가 낄 일도 없었던 것 같다. 찬호 입장에선 내가 미국에 데려오는 데만 힘쓰고 정작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고 서운하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박찬호가 메이저리그 무대를 처음 밟았을 때 어떤 느낌이었나.
“집에서 TV로 찬호의 데뷔전을 봤다. 감개무량할 따름이었다. 동포사회에서 상상도 못하던 일이 벌어졌구나 싶었다. 사비를 들여서라도 동포사회에 기여할 수 있게 돼 참 흐뭇했다. 아무도 알아주진 않았지만 내 작은 헌신이 큰 열매를 맺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영송 회장이 1992년 LA타임스에 보도된 김영삼 대통령 후원 활동 기사를 보고 있다. 이정범 기자
-박찬호의 병역 문제로 청와대까지 찾아갈 정도면 김영삼 정부와 인연이 상당히 깊었던 것 같다.
“YS를 처음 만난 건 1989년이었다. 북한 방문을 마치고 서울에 들렀는데 민주당 총재였던 YS가 우리 상공인단을 점심에 초대했다. 그때 처음 인사를 나눴다. 1992년 대선 직전엔 최형우(91) 전 장관이 LA에 와 민주산악회 미주지회를 만들면서 나에게 지회장을 맡겼다. 이후 YS의 북미지역 후원회장까지 맡았다.
그때 봉합엽서를 대량 구매해 미주 동포들이 YS를 지지한다는 글을 인쇄해 넣고 우편료까지 선납했다. 겉에 한국 주소만 적어 우체통에 넣으면 되도록 했다. 그 엽서를 들고 LA 한인 교회와 단체를 두루 찾아다녔다. LAX 대한항공 카운터를 찾아 한국행 비행기를 타는 사람들에게 엽서를 나눠주며 부모와 형제, 친척과 친구에게 한 장씩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YS 당선 이후 청와대에 부탁한 것은 딱 하나, 박찬호를 미국에 보낼 수 있게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그 외에 한인사회를 위한 활동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미국에 살면서 늘 마음 한편에 빚진 분들이 있었다. 6·25 전쟁에 참전한 미군들이었다. 한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분들에게 감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1992년 한미문화교류재단을 만들어 매년 참전용사들을 위한 위로·감사 행사를 이어갔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000년 한국전쟁 50주년 행사다. LA 일대 재향군인회 등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참전용사들의 명단을 확보해 직접 초청장을 보냈다. 처음엔 40~50명 정도 참석하리라 예상했는데 800여명의 참전용사와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어렵게 확보한 참전용사 명단도 LA총영사관을 통해 한국 정부에 전달했다. 이후 정부가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참전용사들을 찾아 감사의 뜻을 전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일이 가장 뿌듯하다.”
- 2023년 재외동포청이 출범했다. 동포청 설립을 위해 힘써온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석류장도 받았는데 소감은.
“1990년대 초부터 재외동포청 설립과 이중국적 문제 등 동포들의 숙원사업을 해결해달라고 한국 정부와 정치권에 꾸준히 촉구했다. 그렇게 30년 가까이 소망해온 재외동포청이 출범했을 때 누구보다 반가웠다. 오랜 숙원을 받아준 고국과 이를 위해 힘써준 분들에게 감사하다.”
-LA한인상의 회장으로도 일했다. 1989년 회장으로 방북했을 때엔 어떤 목적이었나.
“북한과 교역할 수 있다면 새로운 길을 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재일동포 사업가 박노정 회장의 부인 박경윤 여사의 도움으로 북한의 공식 초청을 받았다. 방북단은 다양한 업종에 종사하는 LA 한인 상공인 14명으로 구성했다. 봉제업, 농수산업, 광산업 등 각자 분야를 놓고 북측과 사업 가능성을 논의했다.
나도 한 가지 사업을 제안했다. 금강산의 지하수를 대한민국에 판매하면 어떻겠냐고 했다. 독점 판매권 이야기도 오갔다. 하지만 서울로 돌아와 보니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다.
다른 업종도 비슷했다. 북측은 우리에게 자금만 요청할 뿐 운영과 관리는 자신들이 맡겠다 주장했다. 외부인이 북한 주민과 직접 접촉하는 것도 극도로 꺼렸다. 결국 투자는 성사되지 않았다. 그래도 직접 가봤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당시로서는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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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송 회장
평안북도 태천 출생(1943)
서울대 치과대학 졸업(1969)
USC 치과대학 졸업(1978)
USC 치과대학 임상조교수(1979~85)
California Medical Dental Center 원장(1983~2021)
LA 라이온스클럽 회장(1984~85), 남가주 한인치과의사 협회장(1987~90), LA한인상공회의소 회장(1988~89), 민주산악회 미주 회장(1991~2001년), 김영삼 미주 후원회장(1992~94), 한미문화교류재단 창립 회장(1992~현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