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이아침에] 정교한 침묵

Los Angeles

2026.09.24 20:27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글자 크기 조절
기사 공유
엄영아 수필가

엄영아 수필가

안개비가 걷힌 아침, 화단 구석의 거미줄에 이슬이 걸렸다. 투명한 물방울이 명주실 한 줄 한 줄에 매달려 있다.햇살이 비추자 작은 물방울마다 하늘과 나무와 집의 모습이 들어왔다. 손바닥만 한 거미줄 안에 바깥세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손끝을 내밀어 거미줄을 건드렸다. 수많은 물방울이 땅으로 떨어졌다. 잠시 전까지 보석처럼 빛나던 거미줄도 힘없이 흔들렸다. 거미는 어디선가 가만히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지도 모른다.대문을 나서려다 얼굴에 거미줄이 감겼다. 끈적한 실이 볼과 머리카락에 닿자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몇 번 털어내다 결국 빗자루를 들었다. 한 번 쓸어내리자 공들여 지은 집이 한순간에 허물어졌다.
 
빗자루 끝에 엉겨 붙은 가느다란 실을 바라보다가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 저 작은 거미에게도 저곳은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지은 집이었을 것이다. 먹이를 기다리고 새끼를 품으며 살아갈 터전이었을 것이다. 나는 불편하다는 이유로 그것을 너무 쉽게 걷어냈다.
 
그날 오후, 다시 화단을 들여다보았다. 거미는 어느새 무너진 자리에 새 줄을 걸고 있었다. 끊어진 곳에서 다시 시작해 하나씩 실을 이어가고 있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그저 다시 지을 뿐이었다. 가느다란 실 하나를 몸에 달고 바람을 타고 떠나는 새끼 거미도 보였다. 작은 몸은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어디론가 멀어져 갔다.자신이 살아갈 곳을 찾아 떠나는 첫 비행 같았다. 한쪽에서는 왕거미 한 마리가 거미줄 가운데 웅크리고 있었다. 거미줄에는 이미 나방과 파리 몇 마리가 걸려 있었다. 왕거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기다림도 사냥도 소리 없이 이루어졌다. 저녁이 되자 바람이 차가워졌다. 거미줄에 걸린 나방은 더는 날개를 움직이지 않았다. 한 생명이 다른 생명의 먹이가 되는 순간에도 자연은 아무 말이 없었다. 살아 있는 것들은 서로에게 먹이가 되고, 그렇게 생명은 또 다른 생명으로 이어졌다.
 
거미의 집을 바라보다 문득 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머니는 평생 자식들을 위해 살았다. 자신의 삶보다 자식의 안녕을 먼저 생각했고, 힘든 일이 있어도 쉽게 내색하지 않았다. 돌아보면 어머니가 우리를 위해 건넨 것은 거창한 말이 아니었다. 말없이 밥을 차리고, 기다리고, 걱정하고, 다시 일어서는 일이었다. 거미가 한 줄 한 줄 실을 뽑아 집을 짓듯, 어머니도 한평생 보이지 않는 실을 뽑아 가족을 지켜냈던 것인지 모른다. 그 침묵 속에는 말보다 깊은 사랑이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거미줄과 다르지 않은지 모른다. 애써 지은 것이 한순간에 무너질 때가 있고,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은 날도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우리는 다시 실 한 가닥을 뽑아낸다.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시작한다.
 
화단을 다시 바라보았다. 어둠이 내려오는데도 거미줄은 가느다랗게 빛나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세상은 끊임없이 소리를 내며 움직이지만, 거미는 침묵 속에서 자신의 집을 짓는다. 무너지면 다시 짓고, 바람이 불면 다시 줄을 잇는다. 나는 그 작은 생명에게서 배운다. 말보다 오래 남는 것이 있고,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침묵이 있다는 것을.
 
저녁 햇살이 사라지고 나서도 거미줄은 한동안 눈앞에 남아 있었다.

엄영아 / 수필가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