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호텔들이 잇달아 고급화에 나서면서 호텔 지형도가 바뀌고 있다. 롯데호텔 서울은 47년 만에 새로 단장했고, 더 플라자는 50주년을 맞아 리모델링에 들어간다. 파라다이스그룹은 장충동에 럭셔리 호텔을 짓고 있다. 여기에 아만과 로즈우드 등 세계적인 럭셔리 호텔 브랜드까지 잇달아 상륙하면서 서울이 하이엔드 호텔의 새로운 격전지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 8월 14일, 롯데호텔 본관을 리뉴얼한 '더그랜드롯데 서울' 로비. 롯데호텔은 기존 신관은 유지하면서 'L7-브리브-롯데호텔-더그랜드롯데-시그니엘’로 이어지는 5단 브랜드 체계를 완성했다고 밝혔다. 사진 롯데호텔
객실 수 줄이고 반세기 역사 얹은 ‘특급호텔’의 변신
최근 리모델링에 나선 곳들은 1970년대 문을 연 1세대 특급호텔이다. 경제 성장과 함께 외국인 관광객 유치가 본격화하면서 당시 서울 도심 곳곳에는 대규모 호텔이 잇달아 들어섰다. 객실 수와 건물 규모를 앞세운 호텔은 성장하는 서울의 위상을 보여주는 상징물이었다. 현재 조선호텔 건물이 1970년 들어선 데 이어 더 플라자(1976년), 그랜드 하얏트 서울(1978년), 롯데호텔 서울과 신라호텔(1979년)이 차례로 문을 열었다.
그로부터 약 반세기가 지나면서 이들 호텔은 노후한 시설을 개선하는 동시에 새롭게 들어서는 고급 호텔과의 경쟁에 대비하고 있다. 공통적인 전략은 객실 수를 줄이는 대신 객실 면적을 넓히고 스위트룸의 비중을 높이는 것이다. 지난달 14일 롯데호텔은 본관 7~21층을 리뉴얼한 ‘더 그랜드 롯데 서울’을 공개했다. 객실 수를 기존 737실에서 590실로 줄이는 대신 객실 면적을 넓혔다. 인테리어는 ‘포시즌스 호텔 조르주 V 파리’와 ‘세인트 레지스 로마’ 등 세계적인 럭셔리 호텔을 디자인한 프랑스 디자이너 피에르 이브 로숑이 맡았다.
더그랜드롯데 서울 디럭스 스위트룸. 객실 수를 기존 737실에서 590실로 줄이는 대신, 객실 면적을 넓혔다. 사진 롯데호텔
더 플라자 역시 이달 말까지 영업을 마치고 약 3년 동안 리모델링에 들어간다. 디럭스룸 위주의 객실 구성에서 벗어나 최고급 스위트룸 중심으로 재편할 계획이다. 예전 특급호텔이 객실 수를 전면에 내세웠다면, 반세기가 지난 지금은 숫자가 아닌 공간의 질과 객실당 가치를 높이는 것이 중요해진 셈이다.
객실과 식음 시설을 고급화하는 동시에 오랜 세월 동안 축적한 역사도 차별화 자산으로 활용한다. 더 그랜드 롯데 서울은 1층 호텔 박물관에서 같은 자리에 있던 반도호텔과 근대기 호텔의 역사를 소개한다. 더 플라자 역시 예부터 서울의 명당으로 꼽혀온 소공동의 역사적 고유성을 옥상정원 조성에 반영할 계획이다.
한화호텔앤드리조트는 더 플라자 호텔을 VIP 비즈니스 거점으로 리뉴얼하면서 근처 한화빌딩과 한화금융플라자까지 전면 재단장할 계획이다. 사진 한화호텔앤드리조트.
장충동부터 여의도까지…서울은 하이엔드 격전지
럭셔리 호텔 경쟁은 기존 중심가를 넘어 서울 전역으로 확산하는 중이다. 파라다이스그룹은 장충동 옛 본사 부지 1만3950㎡(약 4220평)에 지상 18층, 약 200실 규모의 하이엔드 호텔을 짓고 있다. 전 객실을 스위트급으로 구성하는 초고급 호텔로, 2028년 개장이 목표다. 서울신라호텔과 대각선으로 마주 보는 입지여서 두 호텔 간 경쟁에도 관심이 쏠린다.
서울의 하이엔드 호텔 경쟁은 이미 10여 년 전부터 본격화했다. 미래에셋그룹이 2015년 광화문에 국내 첫 ‘포시즌스 호텔’을 열었고, 2017년에는 롯데호텔의 최상위 브랜드인 ‘시그니엘 서울’이 잠실 롯데월드타워 76~101층에 들어섰다. 2021년에는 강남 테헤란로에 ‘조선 팰리스 서울 강남’이, 여의도에는 프랑스 아코르그룹의 럭셔리 브랜드 ‘페어몬트 앰배서더 서울’이 잇달아 문을 열었다.
지난 2일, 아만이 공개한 '아만 서울' 리빙룸 조감도. 글로벌 자산운용 및 개발사 신세계프라퍼티와의 협업으로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사진 아만
해외 럭셔리 브랜드도 서울 상륙 열풍
해외 고급 호텔 브랜드도 속속 진입하고 있다. 지난 2일에는 아만이 한국 진출을 공식 발표했다. 아만은 스위스에 본사를 둔 최상위 럭셔리 호텔 체인 브랜드다. 보급형 대형 호텔 체인과 달리 철저한 사생활 보호와 개인 맞춤형 서비스를 내세워 세계 부호와 유명 인사들이 선호하는 호텔로 잘 알려져 있다.
‘아만 서울’은 청담동 옛 프리마호텔 부지에 들어서며 2030년 개관이 목표다. 블라드 도로닌 아만그룹 회장은 서울을 “문화와 디자인, 기술, 웰니스가 교차하며 전 세계인의 생활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글로벌 도시”라고 평가하며 진출 배경을 밝혔다.
내년에는 용산 옛 유엔군사령부 부지에 ‘로즈우드 서울’이 문을 열 예정이다.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그룹도 서울역 인근에 2030년 개관을 목표로 ‘만다린 오리엔탈 서울’을 준비하고 있다. 옛 밀레니엄 힐튼 서울 부지에는 공공청사와 ‘리츠칼튼 호텔’이 들어서는 복합개발이 추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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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도 객실 몸값도 ‘역대급’
왜 지금 서울에 럭셔리 호텔 붐이 이는 걸까. 가장 직접적인 배경은 서울의 높아진 관광 경쟁력이다. 지난해 한국을 찾은 외국인은 1894만명으로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서울을 찾는 목적도 다양해졌다. K팝과 미식, 패션·뷰티, 메디컬 투어리즘까지 자신의 취향을 경험하려는 관광객이 서울에 머물며 소비한다. 서울이 뉴욕·런던·도쿄 등과 경쟁하는 글로벌 소비도시로 자리매김하면서, 높은 객실료를 감당할 수 있는 고급 숙박 수요도 함께 커졌다.
글로벌 부동산 서비스 기업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에 따르면 2025년 서울 호텔의 평균 객실 점유율은 79.2%로 팬데믹 이전 수준을 넘어섰다. 판매 가능한 객실 한 실당 매출을 뜻하는 객실당 수익(RevPAR)은 20만7345원으로, 2019년보다 67% 상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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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객실 공급은 늘어난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서울의 신규 호텔 공급은 연간 1000실 안팎으로 팬데믹 이전의 4분의 1 수준에 그친다. 땅값과 공사비, 금융비용이 치솟으면서 대규모 호텔을 새로 짓기 어려워진 탓이다. 이에 따라 한 객실에서 더 높은 이익을 거두는 럭셔리 전략이 유리해졌다.
문체부와 한국관광호텔업협회에 따르면 전국 관광호텔 객실은 2022년부터 2024년까지 5성급 객실은 12.1%, 4성급은 28.8% 늘어난 반면 1성급 객실은 45.9% 줄었다. 서울 지역으로만 보면 5성급 호텔 비중은 약 20%로 아직 도쿄나 싱가포르 등 아시아 주요 도시에 비교했을 때는 낮은 수준이다. 초 럭셔리 호텔 브랜드가 서울 행을 만지작거리는 이유다.
2025년 기준 서울에는 총 5만 3675 객실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중 5성급은 약 20%인 1만 735실을 차지한다. 출처: 한국호텔업협회,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
글로벌 호텔의 부동산 셈법
늘어난 관광객과 객실 수요만으로 초고급 호텔의 서울 행을 모두 설명하기는 어렵다. 새로 들어서는 럭셔리 호텔 대부분은 숙박시설만 단독으로 짓는 방식이 아니라 레지던스와 오피스, 상업시설을 함께 개발하는 대규모 복합개발의 일부다. 아만 서울은 49세대의 레지던스와 회원제 아만클럽을 함께 조성하고, 로즈우드 서울도 주거·업무·상업시설이 결합한 ‘더파크사이드 서울’에 들어선다. 리츠칼튼 서울 역시 업무시설과 공공청사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때 호텔 브랜드는 숙박시설을 넘어 개발 사업 전체의 가치를 높이는 ‘명품 문패’ 역할을 한다. 호텔의 시설과 서비스를 공유하는 브랜드 레지던스에는 일반 주거상품보다 높은 가격을 책정할 수 있고, 유명 호텔이 들어선다는 사실만으로 상업·업무시설의 인지도가 높아진다. 객실 영업만으로 투자비를 회수하는 대신 레지던스 분양과 상업시설 임대 등으로 수익원을 다각화할 수 있다.
이런 흐름은 서울만의 특수한 현상이 아니다. 글로벌 부동산 컨설팅사 새빌스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브랜드 레지던스 개발 건수는 지난 10년간 160% 넘게 늘었고, 2031년까지 100개국에서 790개 프로젝트가 추가로 지어질 전망이다. 두바이·마이애미·뉴욕이 이미 브랜드 레지던스의 격전지로 떠올랐고, 이제 그 물결이 서울에도 닿은 셈이다.
2030년 개관 예정인 아만 서울 외관 예상 조감도. 사진 아만
서원석 경희대 호텔경영학과 교수는 “다른 주요 도시와 비교하면 서울의 럭셔리 호텔 시장 형성은 오히려 늦은 편”이라며 “K 컬처의 영향으로 서울이 방문하고 싶은 도시가 됐고, 다양한 소비 성향을 지닌 관광객이 유입되면서 고급 숙박과 미식 등을 아우르는 럭셔리 관광 시장도 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1970년대 특급호텔이 경제 성장과 서울의 발전상을 상징했다면, 반세기 만에 다시 시작된 호텔 경쟁은 달라진 서울의 위상을 보여준다. 이제 호텔은 서울의 문화와 미식, 일상을 경험하는 중요한 거점이자 도시 개발을 좌우하는 핵심 장소가 됐다.
b.트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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