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공정한 기업 간 거래가 만연하고 대다수의 노동자들이 열악한 직무 환경, 불안정한 고용과 장시간 노동의 어려움 속에 있다. 재벌가의 사익편취에 적합하나 기업가치에 반하는 대기업집단의 지배구조가 일반화됐고, 정부와 공공기관 역시 관료 이기주의에 적합한 불투명한 지배구조를 가지고 우리 사회를 부패하게 만들고 있다.”
과징금 급증에 기업 불복도 늘어
심사보고서 공개, 부작용이 더 커
경쟁주창자 본연 업무 잊지 말길
맞는 말도 있지만 표현이 과하다고 느끼는 이가 많을 것이다. 1980년대 대학가의 대자보를 옮긴 게 아니다. 진보와 가까운 경제학자들이 5년 전에 출간한 『정책의 시간』 내용이다. 기업의 불공정 거래가 ‘만연’하고 재벌가 사익편취에 적합한 대기업집단의 지배구조가 ‘일반화’됐다면 책이 출간된 2021년까지 소관부처인 공정거래위원회는 팔짱 끼고 책임을 방기했단 말인가. 책에서 이 챕터를 쓴 사람은 주병기 당시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지금의 공정거래위원장이다. 환경·사회·지배구조를 뜻하는 ESG 경영을 한국이 잘하면 국가와 기업의 가치를 높일 수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현실을 더 가혹하게 진단했을 것으로 짐작은 하지만 균형 잡힌 표현은 아니었다.
분배와 기후 위기를 주로 연구해 온 그가 공정거래위원장에 발탁돼 다소 뜻밖이라고 생각했다. 1년 전 인사청문회와 취임식에선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의 ‘자연적 자유’라는 표현으로 주목받았다. 자연적 자유는 모든 경제주체가 법과 정의를 어기지 않는 한, 자기 방식대로 직업을 선택하고 경제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주병기 위원장은 “자연적 자유를 현실에서 구현하는 것이 공정위의 사명”이라고 했다. 자연적 자유를 막는 독점과 시장 질서 교란행위를 바로잡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건데, 지난 1년을 되돌아보면 자유보다는 처벌 쪽에 방점을 찍은 것 같다.
이재명 대통령은 공정위에 전폭적으로 힘을 실어줬다. 올해 초 업무보고에서 이 대통령은 공정위원장에게 “취임 초 공정위 직원을 500명 늘리라고 했는데 소심하게 147명 늘렸다”고 지적하는 장면이 생중계됐다. 과징금을 크게 늘리라는 지시도 했다. 공정위는 지난 4월 과징금 고시를 고쳐 대통령 지시사항을 적극 반영했다. 대통령은 올해 3월 “담합과 가격조작은 대국민 중대범죄”라며 ‘담합과의 전쟁’을 독려하자 공정위가 전방위로 나섰다. 대통령이 의제를 던지고 공정위가 빠르게 실행하는 ‘톱다운 행정’이 심하면 부처의 자율성이 흔들릴 수 있다.
공정위가 법 집행의 선봉에 나서면서 과징금이 세졌다. 5월 밀가루 담합 7개사에 6710억원, 7월 전분당 담합 4개사에 7476억원의 과징금이 부과됐다. 올해 들어 7월까지 공정위가 부과한 과징금만 1조3527억원으로 지난해(3401억원)의 4배다. 하지만 과징금을 부과받은 기업이 법원에 집행정지를 신청해 징수유예를 받은 금액도 올해 들어 7월까지 4530억원으로 지난해 연간 징수유예액(1876억원)의 2.4배를 웃돈다. 행정소송에서 패소해 공정위가 기업에 돌려준 과징금도 이미 전년 수준을 훌쩍 뛰어넘었다. 시장 교란행위는 엄단해야 하지만 무조건 강한 처벌이 능사는 아니다. 강한 처벌이 기업의 불복 소송을 부르고, 늘어난 소송에 대응하기 위해 공정위 인력자원을 더 많이 투입해야 하는 부작용은 없는지 점검해야 한다.
공정위가 오랫동안 지켜온 관행을 쉽게 깨뜨리는 것도 걱정스럽다. 공정위는 과거엔 법원 1심 판결에 해당하는 전원회의·소회의 심의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해당 사건을 조사한 공정위 심사관의 심사보고서를 공개하지 않았다. 심사보고서를 기업에 보냈는지조차 확인해주지 않았다. 조사받는 기업의 방어권을 보장하고 공정위의 최종 판단이 내려지기 전까지 여론재판으로 흐르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다. 그런데 올해 밀가루 담합 사건에서는 심사보고서를 공개하고 언론 브리핑까지 했다. 조사 기능과 심판 기능이 한 부처에 속해 있는 공정위 조직의 특성을 고려할 때, 정책 홍보를 위한 심사보고서 공개는 심판의 독립성과 중립성, 공정성을 흔들 수 있다.
내달 1일 출범하는 국(局) 단위의 경제분석국은 공정위의 숙원사업이었다. 시장 획정부터 위법성 입증까지 실증 분석을 통해 데이터에 기반한 경쟁정책을 펴는 든든한 기지가 될 것이란 점에서 잘한 일이다.
주 위원장은 ‘길항 권력(대항하는 힘)’을 키우고, 경제적 강자가 압도하는 ‘착취적 제도’를 경계하는 말을 취임사에서 했다. 갑의 횡포를 막고 을의 눈물을 닦아주는 게 정책 수요 분명한 한국 경쟁당국의 업무라는 건 이해한다. 갑을 관계의 해결사로 나서는 것 못지않게 반독점과 경쟁 주창자라는 본연의 업무도 소홀하지 말기를 바란다. 둘 다 잘하기는 참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