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이 호르무즈해협 재개방을 위해 제시한 ‘7일 계획’을 거절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이번 주 이란과 대화가 이뤄질 것”이라고 밝혔다. 이란 역시 트럼프의 제안 거부에도 “중재자를 통한 공식 답변을 기다리겠다”며 여전히 협상에 열려 있다고 확인했다. 하지만 비핵화와 제재 등을 놓고 양측 간 이견이 커 대화가 재개되더라도 의미 있는 결과가 도출될지는 미지수다.
지난 23일(현지시간) 이란 테헤란의 거리에서 시민들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비판하는 광고판 앞을 지나고 있다. AFP=연합뉴스
미 정치전문 매체 악시오스는 27일(현지시간) 트럼프가 전화 인터뷰에서 “이란은 합의하고 싶어하지만 내가 원하는 내용의 합의가 아니다”라며 이처럼 말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는 “1년 전이었다면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내용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란은 무리수를 뒀다(overplayed their hand)”고도 했다.
악시오스는 다른 역내 소식통 2명도 “이르면 28일 미국과 이란 간에 간접적인 대화가 이뤄질 것”이라고 확인했다고 전했다. “중재자인 카타르가 합의 도달을 위해 셔틀 외교를 계속하고 있다”면서다.
트럼프는 이란에 대한 공습 재개도 고려하느냐는 질문에는 “그 방안은 언제나 생각하고 있다”고 답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 25일 트럼프가 중간선거 이후 공습을 재개할 것 같다고 참모들에게 말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는 전날 이란의 7일 계획을 거절했다고 밝히며 “(이란은) 너무나 크게 패배하고 있어서 해협을 즉시 개방하는 합의를 맺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이란이 제안한 7일 계획은 미국이 해상 봉쇄를 풀고, 이란에 대한 제재와 동결 자산을 일부 해제하면 7일 안에 호르무즈해협을 다시 열고 핵협상을 할 수 있다는 게 골자였다.
악시오스는 “카타르 측이 이란의 제안 원안과 관련해 양측과 협의한 뒤 수정안을 제시했다. 주말 사이 카타르 측이 미국 및 이란과 각기 의견을 주고받으며 문안 수정을 협의했다”고 설명했다. 트럼프가 언급한 “이번 주 중 대화”는 카타르 측이 스티브 윗코프 미 대통령 특사와 아바스 아라그치 이란 외무장관을 각기 만나는 형식이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유엔 총회 참석차 뉴욕을 방문 중인 아라그치도 이날 미 NBC 방송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제안을 거절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중재자를 통한 미국의 공식적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며 여전히 외교적 해법을 원한다는 뜻을 밝혔다. 뉴욕에 머무는 동안 미국과 협상이 성사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으나 이란 정부 소식통은 28일 국영 IRNA 통신에 “뉴욕에서 더는 미국과 협상할 계획이 없다”며 29일 귀국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면서도 “이란의 고려 사항과 입장은 지난 22일 카타르 중재자를 통해 미국 측에 분명하고 명확하게 전달됐으며, 이란은 현재 미국 측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란이 호르무즈해협에서 미 군함이나 상선 공격 등 ‘실력 행사’를 하면서도 이처럼 외교의 문을 계속 열어두는 건 미국의 전방위 제재 압박으로 인해 경제난이 심해지는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수십년 간 제재를 받은 만큼 체제의 내구성은 견고하지만, 미국이 최근 2차 제재(이란과 거래하는 제3국 기업이나 개인도 제재)를 무기로 전 세계를 제재에 동참시키려 하는 가운데 전쟁 피해까지 고려하면 미국과 합의 없이는 본격적인 경제 회복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란 입장에서는 파기를 선언하기는 했어도 지난 6월 미국과 맺은 종전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완전히 포기하기도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MOU는 해상 봉쇄 해제와 원유 수출 재개를 시작으로 제재·동결자금 문제를 풀 수 있는 틀이기 때문이다. 이란이 협상을 통해 MOU로 돌아가자고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이유다.
또 이란산 원유의 최대 구매국이자 군사 정보 등에서 이란을 지원해온 중국이 지난 24일 미국과의 정상회담에서 이란 문제를 논의한 것이 이란에 압박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백악관은 회담 결과를 발표하며 트럼프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이란의 핵무기 보유와 국제 수로 통행세 부과에 반대한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고 밝혔다. 중국이 미국 편에 서지는 않겠지만, 양국이 정상급에서 당분간 관계 관리에 방점을 찍기로 한 만큼 이란 입장에서는 중국의 적극적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워질 가능성이 있다.
다만 양측은 본질적인 사안에서 충돌하고 있어 문안 수정 정도로는 합의에 이르기 어렵다는 시각이 많다. 호르무즈해협 개방, 고농축 우라늄 반출 등 비핵화 협상, 제재 완화 등과 관련해 미국과 이란은 누가 먼저 행동에 나설지를 두고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마이크 왈츠 유엔 주재 미국 대사는 이날 CNN 인터뷰에서 이란이 비핵화 협상을 재개하기에 앞서 제재 완화와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동결 자산”에 대한 접근권을 요구했기 때문에 트럼프가 제안을 거절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들은 나중에 대화하겠다는 약속만 내건 채 모든 것을 사전에 먼저 내놓으라고 요구했다”면서다. 그는 NBC와의 인터뷰에서도 이란의 제안을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점을 뻔히 알면서도 협상 테이블에 던진 지극히 냉소적인 술책”으로 표현했다.
이와 관련, 이란은 호르무즈해협 재개방을 협상력 제고 수단으로 삼아 미국의 해상 통제 해제와 제재 완화 등을 전제조건으로 요구하고, 미국은 이란이 핵 문제에서 진정성을 보이지 않는 이상 현상 변경은 없다는 입장으로 맞서고 있다.
트럼프는 호르무즈해협을 상당 부분 통제하고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는 이날 악시오스에도 주말 사이 “2000만 배럴 이상”의 원유가 해협을 빠져나왔으며, 이는 이란전이 시작된 이후 가장 많은 양이라고 강조했다.
여전히 이란전 여파로 오른 에너지 가격을 잡지 못하고 있지만, 해협 통항량이 회복되고 있다면 이는 해협 봉쇄를 지렛대로 미국을 압박하는 이란의 힘이 약해지고 있다는 뜻일 수 있다. 현실적으로 중간선거 전 이란전을 끝낼 가능성이 크지 않은 가운데 상황을 관리하면서 국내외적으로 희생을 감수할 만한 ‘명분’을 설득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게 트럼프의 판단일 수 있는 셈이다. 이에 한동안 호르무즈해협 재개방에 쏠려 있던 관심을 본래 전쟁을 개시한 목표인 비핵화로 돌려 협상의 구도 자체를 전환, 이란으로부터 더 많은 양보를 얻어내려는 의도로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