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수도권의 한 헌책방 주인은 최근 온라인으로 책을 1000권 넘게 팔면서 주문이 일정한 간격으로 들어온다는 점을 눈여겨봤다. 처음엔 “누군가 시스템을 짜서 기계적으로 구매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횡재’를 한 헌책방은 이곳만이 아니었다.
지난 7월 무렵부터 일본 각지 헌책방에 이런 대량 주문이 잇따르고 있다고 니혼TV가 27일 보도했다. 이에 따르면 하루 100권이 팔리거나 매출이 평소의 5배로 뛴 곳도 있었고, 평소 많이 팔리던 소설·만화 대신 철학·역사·의학·법률 전문서가 한꺼번에 팔려나간 곳도 있다고 한다. 니혼TV는 앞서 22일에도 지난해부터 일본의 한 대형 도서 유통회사 자회사가 미국으로 책 50t 이상을 수출한 기록을 공개했다. 한 권을 500g으로 잡으면 약 10만권 규모다.
이처럼 헌책을 대량으로 사들이는 주체가 인공지능(AI) 기업일 수 있다는 추측이 일본 출판업계에서 나온다. 공개 웹에서 찾기 어려운 지식과 정보를 담은 오래된 책을 AI 학습자료로 확보하려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일본 외 국가에서도 이 같은 비정상적 헌책 주문이 이어지고 있다.
영국 BBC는 지난 8월 15일 영국 북부 노섬벌랜드의 헌책방 바터북스가 캐나다 업체로부터 평소 일주일분 판매량인 2000~3000권의 주문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주인 스튜어트 맨리는 “헌책 장사를 30년 하면서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했다. 다만 자신의 책이 AI 학습용으로 구매됐다는 증거는 없다고 밝혔다.
독일 공영방송 NDR이 취재한 베를린의 한 헌책방도 수년간 팔리지 않던 전문서적 주문이 야간 시간대에 집중됐다고 한다. 주인은 5유로(약 7700원)짜리 책을 보내는 데 배송비가 40유로(약 6만1000원) 드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네덜란드 하를럼의 한 헌책방에도 AI 관련 단체 관계자를 자처한 사람이 전문서 3000종 이상의 목록을 보내 중국행 배송 견적을 문의했다. 지난 7월 포춘지는 “처음 주문을 받았을 때, 스팸이나 사기라고 생각했다”는 서점 주인의 말을 전했다.
한편, 미국 탐사매체 404미디어는 지난 8월 미국의 한 헌책방과 협력해 책 한 권에 추적 장치를 넣어 배송 경로를 추적한 결과, 이 책이 라스베이거스 아마존 시설에 도착했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현장 직원들은 대량으로 들어온 책의 책등을 잘라 낱장을 스캔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종이책은 파괴됐다고 한다.
아마존 측은 미국 경제매체 Inc.에 “제품·서비스 개발과 개선을 위해 책을 구매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구매량과 구체적인 활용처는 공개하지 않았다.
AI 모델 ‘클로드’ 개발사 앤트로픽도 작가들이 제기한 저작권 침해 소송 과정에서 책을 대규모로 구매한 사실이 드러났다. 지난해 6월 미국 연방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앤트로픽은 수백만 달러를 들여 중고책을 포함한 종이책 수백만권을 샀다. 외주업체가 책을 해체해 스캔한 뒤 종이 원본을 버렸고, 앤트로픽은 이렇게 모은 자료 중 일부를 AI 학습에 사용했다고 한다.
이런 방식은 저작권 분쟁으로도 이어졌다. 법원은 앤트로픽이 책을 구입해 AI 학습에 이용한 행위를 ‘공정 이용’으로 인정했다. 합법적으로 구매한 종이책을 스캔한 뒤 원본을 폐기하고 사내 디지털 자료실에 보관한 행위도 허용했다.
하지만 미국 작가협회는 판결 이틀 뒤 성명을 내고 반발했다. 종이책을 구매했다고 해서 이를 스캔해 AI 학습에 사용할 권리까지 얻은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협회는 AI가 원작과 경쟁하는 글을 만들어낼 가능성과 작가들이 학습용 이용료를 받을 기회를 잃는 피해를 법원이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영국 출판협회 역시 해당 판단을 저작물을 이용한 AI 학습 전반에 대한 허용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AI 기업들이 헌책을 대량 구매해 스캔한 뒤 원본을 폐기하는 관행에 대해, 절판본이나 필기·주석이 남은 책까지 선별 없이 해체하면 보존 가치가 있는 자료가 사라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헌책방의 반응은 복잡하다. 오랫동안 팔리지 않던 책이 팔리는 것은 반갑지만, 책의 최종 목적지를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런던의 헌책방 월든북스를 운영하는 데이비드 토빈은 BBC에 “수년간 팔리지 않던 책들이 팔리는 것은 좋지만, 결국 파괴된다면 안타까울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