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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주목하게 만드는 주목

중앙일보

2026.09.28 08:10 2026.09.28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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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경 원불교 청라교당·더시그넘하우스청라 교무

한진경 원불교 청라교당·더시그넘하우스청라 교무

쌀쌀한 아침 공기를 가르며 햇살이 비켜 드는 사이로 주목 나무가 내 눈길을 잡는다. 짙은 초록 잎 사이로 작고 고운 빨간 열매가 햇빛에 수줍은 듯 반짝인다. 정원 한쪽에 듬직하게 자리 잡고 있지만, 큰 변화가 없어 평소에는 손길도 눈길도 잘 가지 않던 상록수다. 그런 주목이 오늘따라 ‘나를 좀 눈여겨봐 달라고’, ‘내게 관심을 두고 주의 깊게 살펴봐 달라고’ 말하는 듯하다. 뾰족한 바늘 모양의 진한 초록 잎과 보색 대비를 이루는 동그랗고 말랑말랑한 빨간 열매의 선명한 반전은 충분히 나를 주목(注目)하게 만든다. “반가워, 어여쁜 열매야.”

천년 사는 붉은 상록수 주목처럼
작은 반전과 감동이 오래 기억나
꾸준한 평범함이 큰 성공의 비결

김지윤 기자

김지윤 기자

늘 푸른 상록수인데 이름은 붉을 주(朱)에 나무 목(木)자를 써서 주목(朱木)이다. 줄기의 껍질과 속(심재)의 색깔이 모두 붉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름에서부터 반전인 주목은 천천히 자라지만 수명이 길고, 죽어서도 그 형상을 오래 유지한다고 해서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의 나무라고 불린다. 오랜 세월을 한자리를 지키며 보고 듣게 되는 사연들은 얼마나 많으며, 반전에 반전을 이루며 펼쳐지게 될 이야기는 또 얼마나 될까?

여행을 가면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는 말을 하며 부지런히 사진을 찍는다. 신기한 것, 멋진 풍경, 함께한 사람들을 찰나의 순간에 담는다. 어렸을 때 나는 사진 찍히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다가 순간을 포착하고, 빛과 시간을 조절해 만들어내는 사진의 즐거움을 알게 되면서 찍히는 것보다 찍어주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사진으로 남기지 않아도 마음에 오래도록 남는 장면들이 있다. 학생 시절 도반(道伴)들과 인도 배낭여행을 했었다. 한 달간 히말라야 산맥의 오지 마을 라다크(Ladakh)에 있는 원불교 기관에서 봉사활동을 한 후 보너스로 받은 여행이었다. 여행 책자에서 고른 타지마할이며 갠지스강 등 인도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들을 구경했다. 마더 테레사의 집에서 봉사도 하고, 요가 수행자인 요기를 수소문해 요가 수련원도 찾아보았다. 그중에서 한 번씩 떠올리며 함께 했던 도반들과 추억을 나누는 장면은 멋진 풍경도 유명한 장소도 아니다.

연일 40도가 넘는 더운 날씨에 감기에 걸려 이마까지 염증이 차올라 고생하던 도반을 위해 어렵게 식당 주방을 빌려 흰죽을 끓여 먹이던 장면, 인도에서 꼭 경험해봐야 할 목록 중 하나라는 영화관에서 주인공의 희로애락에 함께 반응하는 관객들을 영화보다 더 재미있게 구경하던 장면, 무슨 일이었는지 기억도 되지 않는 별것 아닌 일로 투닥대며 서운해하다가도 위기의 순간에 하나로 단단해졌던 장면 등이다.

많은 일들 중에서 기억하게 만드는 것은 순조로웠던 순간들이나 눈으로 보는 화려하고 멋진 장면이 아니라, 렌즈로는 담지 못하는 찰나의 순간에 느낀 감정, 그 순간 내 마음을 울렸던 분위기나 기대하지 않았던 작은 반전일지도 모른다. 오늘 아침, 초록 잎 사이에서 수줍게 빛나며 나를 정지시켰던 저 자그마한 주목 열매처럼 말이다.

원불교 정산 종사께서 “역사는 세상의 거울이라 하였나니, 이것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일의 흥망성쇠가 다 이 역사에 나타나는 까닭이니라. 그러나, 역사를 보는 이가 다만 문자에 의지하여 지명(地名)이나 인명(人名)이나 연대(年代)만 보고 잘 기억하는 것으로 능히 역사의 진면(眞面)을 다 알았다고 할 수 없나니, 반드시 그때의 대세와, 그 주인공의 심경과, 그 법도(法度) 조직과, 그 실행 경로를 잘 해득하여야만 능히 역사의 진면을 볼 수 있고, 내외를 다 비치는 거울이 될 것”이라 말씀하셨다.

나의 하루하루가 모여 내 삶의 이야기가 되고, 역사가 된다. 내 삶의 장면 장면이 찍힌 사진 속의 나로 내 삶을 본다면 내 이야기의 진면을 보지 못할 것이다. 무언가를 주목하게 만드는 요소는 분야에 따라, 성격에 따라 제각각이겠지만, 탁월하거나 예측 못 한 의외의 반전이 있을 때였다. 그러나 그 반전이 아름다운 추억이 되기 위해서는 천천히 성장하는 주목 나무처럼, 스쳐 지나가는 무수한 계절 속에 천천히 채워가는 나의 일상과 순조롭게 넘겨온 순간순간이 쌓여야 한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도 평범함의 힘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록 특별한 선과 특별한 기술은 없다 할지라도 오래 평범을 지키면서 꾸준한 공을 쌓는 사람은 특별한 인물이니, 그가 도리어 큰 성공을 보게 되리라.”

한진경 원불교 청라교당 더시그넘하우스청라 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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