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 물이 어디서 새어 나왔지?” 차고에 들어서자 냉장고 주변 바닥에 불그스레한 물이 흥건하다. 냉장고 문을 여는 순간, 차가운 공기 대신 열기가 얼굴로 밀려온다. 수박에서는 물이 흘러내리고, 채소는 축 늘어져 있다. 생선에서는 쿰쿰한 냄새까지 올라온다. 냉장고가 기능을 잃자 안에 있던 것들이 하나둘 모습을 잃어가고 있었다. 제 기능을 잃은 냉장고는 어느새 ‘온장고’가 되어 있었다.
겉보기에는 멀쩡하다. 그런데 냉기가 돌지 않는다. 부엌 냉장고에는 조리한 음식을, 차고 냉장고에는 주로 신선한 식재료를 넣어 두고 써 왔다. 다행히 냉동칸은 이상이 없다. 냉장고가 신선함을 유지해 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여겼다. 그 수고가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깊이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고장이 나고서야 아무렇지 않게 누리던 것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내부를 청소하다 말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 자리에서 제 몫을 다하고 있을까?
냉장고는 눈에 띄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저 정해 놓은 온도를 지키며 음식이 상하지 않게 한다. 우리는 냉장고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않은 채 매일 문을 여닫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그것이 냉장고가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는 뜻이다.
사람에게도 저마다 맡은 자리가 있고, 그 자리에서 감당해야 할 몫이 있다. 나 역시 아내로, 엄마로, 딸로, 며느리로, 친구로 여러 이름을 가지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 이름에 걸맞게 늘 제 몫을 다한 것은 아니다. 내 마음을 앞세우느라 가까운 이의 마음을 미처 살피지 못할 때도 있었다.
매일 마주하는 가족의 수고를 당연하게 여기고, 오래된 친구에게 연락을 미루며 서운한 마음을 그대로 둘 때가 있다. 별것 아닌 듯 넘긴 무관심이 쌓이면 예전처럼 편하게 말을 건네기 어려워진다. 관계는 갑자기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멀어진다.
냉장고가 고장 났다고 바로 버리지는 않는다.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살펴보고, 고칠 수 있다면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사람 사이도 그랬으면 좋겠다. 마음이 조금 멀어졌다고 쉽게 끝이라고 단정하기보다, 무엇이 달라졌는지 한 번쯤 돌아보는 것.
나도 ‘다음’으로 자주 미뤘다. 한가해지면 연락해야지, 다음에 만나면 이야기해야지 하며 미뤄 둔 말이 적지 않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언제든 다시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이 언제까지나 유효한 것은 아니다. 이제는 무엇을 더 이루어야 하는지보다, 지금 내 곁의 사람에게 어떤 사람으로 남고 싶은지를 생각한다.
다행히 냉장고는 기능을 되찾았다. 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얼굴에 닿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하루가 다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