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유해진(왼쪽부터)과 박해일, 이민호가 10일 서울 용산구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영화 '암살자(들)' 제작보고회에 참석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뉴스1
영화 ‘암살자(들)’의 역사 왜곡 논란이 영화 바깥까지 번지고 있다.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은 물론 시사회에 참석하거나 영화를 추천한 배우들까지 ‘불매 리스트’에 이름이 올랐다. 유명 유튜버들의 영화 리뷰 영상에도 비판 댓글이 다수 달리며 유튜버들이 영상을 자진 삭제하거나 해명에 나서는 사례도 이어지는 중이다.
23일 개봉한 ‘암살자(들)’은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다. 당시 정부의 수사 결과 발표 등에 의문을 가진 형사와 기자들이 사건의 배후를 추적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역사 왜곡 논란을 낳은 부분은 주인공들이 사건을 추적한 결과 배후에 중앙정보부가 있으며, 한·일관계 등으로 인해 위태로워진 정치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자작극을 벌인 것 아니냐는 의혹을 품게 된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내용이다. 이를 두고 “북한 김정일이 직접 육 여사 사건에 대해 사과했는데 이런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역사 왜곡”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영화 ‘암살자(들)’을 보고 배우·인플루언서들이 남긴 자필 추천사. 사진 하이브미디어코프
논란이 일파만파 커지자 영화에 직접 출연한 배우들을 넘어 시사회에 초대 받거나 영화를 추천한 배우들까지 뭇매를 맞고 있다. 몇몇 배우들은 영화를 관람한 뒤 자필 추천사를 남겼는데, 이를 두고 일부 시민들은 “역사 지식이 부족하고 정치적으로 편향됐다”며 이들의 이름을 담은 명단을 만들었다. 추천사에 ‘진실’이라는 표현이 등장한 것을 두고 일부 배우들의 소셜미디어(SNS)에도 비난 댓글이 이어지고 있다.
영화 리뷰 유튜버들도 곤욕을 치르고 있다. 구독자 417만 명의 영화 유튜버 ‘지무비’는 ‘암살자(들)’ 소개 영상을 올렸지만 비판 댓글이 이어지자 별다른 공지 없이 해당 영상을 삭제했다. 구독자 약 24만 명의 유튜버 ‘김단군’도 해당 영화 리뷰 영상을 올렸는데, 이를 두고 날선 반응들이 이어지자 영상을 삭제했다. 이후 그는 “누군가에게 불편한 영화일 수 있단 걸 몰랐다. 정치적으로 무지했다”며 해명 영상을 올렸으며, 이 영상 역시 회원 전용 공개로 전환했다.
일부 단체는 ‘암살자(들)’에 대한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1971년부터 3년간 육 여사를 보좌했던 김두영 전 청와대 비서관은 28일 중앙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박정희기념재단과 육영재단 측에서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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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 고의성’ 있었는지가 관건
과거에도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를 두고 비슷한 논란이 이어져 왔다. 2005년 박 전 대통령이 살해당한 10·26 사건을 다룬 영화 ‘그때 그사람들’에 대해 박 전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씨가 고인과 유족의 명예를 훼손한다며 상영금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당시 법원은 상영금지 처분은 과도하다고 봤지만, “영화의 일부가 고인에 대한 왜곡된 인상을 준다”며 일부 다큐멘터리 장면을 삭제하고 상영하라고 결정했다. ‘암살자(들)’이 상영금지 가처분 심리를 받을 경우, 재판부는 작품을 두고 표현 내용이 진실인지, 피해자가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를 입었는지, 공공에게 이익인지 등을 기준으로 법적 처리 여부를 판단할 것으로 법조계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영화 제작진들은 형사고발도 당했다. 이종배 전 국민의힘 서울시의원은 29일 허진호 감독과 제작진을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경찰청에 고발했다고 밝혔다. 형법 전문가들은 허위사실의 적시가 명시적 표현에 한정되지 않고, 간접적·우회적 표현으로도 성립할 수 있다고 본다. 주성완 가로재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영화 속 대사뿐 아니라 인물의 행동과 결말 등을 고려했을 때, 영화 전체가 특정 메시지를 사실처럼 받아들이게 한다면 허위사실 적시의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사자명예훼손 혐의 적용 가능성도 제기한다. 곽준호 법무법인 청 변호사는 “박 전 대통령이 아내(육 여사) 피격의 배후였다고 암시하는 묘사는 고인의 사적인 인격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유족 측에서 사자명예훼손 성립 여부를 충분히 검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영화 '암살자(들)' 스틸컷. 사진 하이브미디어코프
다만 법원이 역사적 사건을 다룬 영화에 대해 의도적 왜곡이 아닐 경우 표현의 자유를 폭넓게 인정한 사례 역시 존재한다. 2013년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에 대해 유족 등은 허위사실이 담겼다며 상영금지 가처분을 신청했지만, 재판부는 “의혹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투명한 논의를 위한 것”이라며 기각했다. ‘암살자(들)’ 제작진도 28일 “역사적 사건을 모티브로, 영화적 상상력을 더해 재구성한 것”이라며 사실 왜곡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영화계에서는 영화적 상상력과 그에 따른 책임을 두고 엇갈린 반응이 나오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감독은 “영화에 실제적인 묘사가 많이 들어가 관객들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충분히 오해할 소지가 있다”며 “‘영화를 단순히 영화로만 봐달라’고 하지만 그런 측면에서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했다. 반면 허남웅 영화평론가는 “다큐멘터리와 극에 대한 접근은 달라야 하며, ‘암살자(들)’은 제작진이 역사적 자료를 토대로 영화적 상상력을 가미해 만든 것”이라며 “진정 문제될 부분이 있다면 시장과 관람객이 평가하고 자연스럽게 자정될 것”이라고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