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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자(들) 북한 드라마보다 더 소름 끼쳤다 [안혜리의 시선]

중앙일보

2026.09.29 08:16 2026.09.29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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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영화 '암살자(들)' 제작보고회에 허진호 감독과 배우 유해진, 박해일, 이민호(왼쪽부터)가 나와 영화를 홍보했다.연합뉴스

지난 10일 영화 '암살자(들)' 제작보고회에 허진호 감독과 배우 유해진, 박해일, 이민호(왼쪽부터)가 나와 영화를 홍보했다.연합뉴스

영화 '암살자(들)' 개봉일인 지난 23일 오전. 제작사인 하이브미디어코프는 VIP 시사회에 참석했던 배우·감독·작가 등의 친필 응원 문구를 언론과 SNS에 대대적으로 뿌렸다.
'아프지만 진실은 이긴다!'(배우 박병은),
'진실을 찾아가는 숨 막히는 시간들'(배우 임수향),
'진실…누가 암살자인가'(배우 김유미)….
1974년 광복절, 재일동포 문세광이 육영수 여사를 저격해 살해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한 영화를 놓고, 배우 김고은과 김은희·김은숙 작가 등 숱한 유명인들은 "감춰졌던 진실이 이 영화를 통해 비로소 드러났다"는 식의 호기심 유발로 관객몰이를 돕고 있었다.
픽션·팩트 경계 지운 계산된 설계
영화적 상상력 아닌 분명한 조작
"진실" 운운한 영화계 공범 아닌가

기자 출신 유명 영화평론가 이동진도 비슷한 방식으로 관객 동원에 일조했다. 그는 '영부인 저격 사건의 배후는 누구?'라는 제목의 유튜브 영상에서 "이 영화가 그런 부분(모순·은폐)을 파헤치는 걸 음모론 정도로 치부할 수 없다, 중대한 의문 제기"라며 대놓고 영화의 진실성에 무게를 실었다.
영화 '암살자(들)을 다룬 영화평론가 이동진 유튜브. 그는 이 영화가 확실하게 범인은 이 사람이라고 밝히지 않고 강하게 풍기기만 하기에 프로파간다가 될 수 있는 위험을 피했다는 식으로 말했다. 영화를 보면 동의하기 어려운 의견이다. [유튜브 캡처]

영화 '암살자(들)을 다룬 영화평론가 이동진 유튜브. 그는 이 영화가 확실하게 범인은 이 사람이라고 밝히지 않고 강하게 풍기기만 하기에 프로파간다가 될 수 있는 위험을 피했다는 식으로 말했다. 영화를 보면 동의하기 어려운 의견이다. [유튜브 캡처]

제작사, 그리고 대중 영향력이 큰 인물들의 이런 강력한 관람 가이드라인 덕분인지 추석 연휴 동안 100만 넘는 관객이 들었을뿐더러, SNS엔 "몰랐던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됐다"는 관람평이 줄을 이었다.
'그때는 문세광이 범인인 줄 알았는데 역시 정권연장을 위해 그랬구만',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역사도, 모르는 것투성이'(페이스북 포스팅)…. 극장 앱 실 관람평도 마찬가지였다. '의문이었던 영부인 저격의 진실', '진실을 숨기는 무서운 독재정권', '늦었지만 육영수 여사 피살 규명이 이루어져야 한다'…. 관람객 상당수가 이 영화를 허구나 영화적 상상력이 아닌 새롭게 드러난 실체적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대체 어떤 형식, 어떤 내용이기에 제작사의 홍보·마케팅 노림수 그대로 이런 반응이 나오는지 궁금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야 이해가 됐다. 대사와 화면 속 소품 문구뿐만 아니라 시작 자막부터 마지막 에필로그까지, 그야말로 이 영화는 형사 박철구(유해진 분)나 사회부장 김재환(박해일), 기자 한영일(이민호) 등만 가공일뿐 나머지는 전부 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장치로 가득했다.

역사 왜곡 논란이 거세져 예매율이 뚝 떨어지자 제작사 측은 그제야 "사실을 부정·왜곡하려 제작한 영화가 아니고, 어디에도 특정 인물을 배후로 규정하거나 극적 설정을 역사적 사실로 제시하고 있지 않다"고 해명했다. 해명조차 거짓이다. 영화를 보면 '작정하고 만든 역사 조작' 외에는 달리 해석하기 어렵다.

우선 자막. 다큐가 아닌 이상 실화나 실화를 연상시키는 소재만 다뤄도 영화 서두에 통상 '본 작품은 실제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었으나, 극적 구성을 위해 각색된 허구'라고 안내한다. 이 영화는 다르다. '실화를 바탕으로 창작되었다'고 고지한다. 문세광은 굳이 문태광(박정민)으로 바꿔 부르면서 김신조·김대중 등 모든 역사적 인물은 실명으로 등장시킨다.

특히 마지막에 실제 피살 장면을 담은 흑백 영상·사진과 함께 '파면당한 경찰관 28명은 끝내 복직하지 못했다'거나 '문세광은 대법원 선고 후, 이례적으로 3일 만에 사형되었다'는 문구를 담아 의도적으로 픽션과 팩트의 구분을 무너뜨린다. 그리고 마지막 한 방. '문세광은… 영부인을 저격할 여지가 없었습니다-감식계장 증언 / 영부인을 숨지게 한 탄환은 아직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

내용은 더 기가 막히다. 있지도 않았던 사실로 계속 박정희 정부의 자작극으로 몰아간다. 가령, 청와대 경호계장은 경호지침이 바뀌었다며 억지로 문태광을 들여보내고, 기자 등의 전언으로 "육 여사님이 오늘 행사에 참석하기 싫어했다더라"거나 "행사 직전 방탄 연설대로 바꿨다"며 자작극에 힘을 싣는다. 사건 발생 불과 10분 뒤인 당일 오전 10시 40분에 중앙정보부는 어떻게 알고 문태광의 호텔로 들이닥쳐 증거를 전부 수거해간다. 수사본부는 15일 문태광의 저격 준비 과정을 언론 브리핑 했는데, 다음날인 16일이 돼서야 김기춘 전 박근혜 비서실장을 모델로 한 김학수 검사가 기자회견을 통해 자기가 문태광 입을 처음 열었다고 거들먹거린다(※사실:15일엔 문 단독 범행 주장에도 계속 조사중이라는 발표, 16일에 조총련이 배후라는 자백을 받았고 회견은 하지도 않았음). 심지어 기자들이 돌려보는 텔레타이프 문서엔 명확하게 "일본 언론은 자작극으로 보도했다"고까지 나온다. 물론 전부 허구다. 관객은 전부 사실로 받아들인다.
개봉 전 김원국 하이브미디어코프 대표는 기세등등하게 "영화를 보면 제목에 왜 (들)이 붙었는지 알 것"이라고 했고, 허진호 감독도 "사실을 던져놓고 실제 역사적 사실과 비교하며 판단하는 건 관객의 몫"이라고 했다.
북한 드라마 '민족과 운명' 제1편 말미에 등장하는 1974년 광복절 기념식 장면. 박정희 대통령 경호원(오른쪽)이 무대 뒤에서 육영수 여사를 쏘려고 기다리고 있다. [유튜브 캡처]

북한 드라마 '민족과 운명' 제1편 말미에 등장하는 1974년 광복절 기념식 장면. 박정희 대통령 경호원(오른쪽)이 무대 뒤에서 육영수 여사를 쏘려고 기다리고 있다. [유튜브 캡처]

허구를 사실로 둔갑시켜놓고 역사와 비교해 판단하라고? 이게 역사를 다시 쓰려는 왜곡조작 아니면 뭔가. 영화가 참조했을 거라 의심받는 북한 드라마 '민족과 운명' 제1편(1992) 말미엔 기념식 무대 뒤에서 경호원이 몰래 육영수 여사를 총으로 쏘는 장면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을 가리켜 "자기 처를 재물로 바쳐 흔들리는 독재 정권을 유지한 살인 악마"라고 한다. 자기들 범행을 은폐하려 대한민국 대통령을 살인마라 부른 북한 드라마보다 거짓을 사실인양 선동한 '암살자(들)'이 더 소름 끼치게 무섭다. 이쯤 되면 제작자는 역사 조작의 주범, '진실' 운운한 유명인들은 공범으로 불려야 마땅하지 않을까.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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