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등 인류 공동의 가치보다 실리가 중요해진 국제사회에 이른바 ‘불량국가’들이 속속 귀환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와 우크라이나·이란전쟁 등으로 국제 질서에 균열이 일며, 북한·미얀마 등 인권 탄압으로 지탄을 받아온 국가들의 외교적 공간이 넓어지는 모습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21일 노동당 제3차 선전부문일군강습회 폐강식에 참석해 연설했다고 조선중앙TV가 22일 보도했다. 연합뉴스
28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총회에서 김선경 북한 외무성 부상(차관)은 “핵보유국의 지위는 그 어떤 경우에도 그 무엇으로도 되돌릴 수 없다는 공식 입장을 다시금 확인한다”고 밝혔다. 지난 22일 이재명 대통령이 유엔총회에서 “북측의 핵·미사일 능력 고도화를 중단시키고, 중기적으로 축소를 거쳐 장기적으로 핵 없는 한반도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연설한 지 6일 만이다. 다자외교의 핵심 무대인 유엔에서 ‘단계적 비핵화’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김 부상은 또 “조선민주주의공화국이 보유한 핵 억제력은 외부의 침략과 위협으로부터 주권과 안전, 평화를 수호하기 위한 절대적 힘이며 불가항력”이라며 “압도적인 힘의 강세로 온갖 위협을 통제·관리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김선경(왼쪽) 북한 외무성 부상이 29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총회 일반토의에서 북한 대표로 기조연설한 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과 면담했다. 연합뉴스
북한이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는 배경에는 달라진 국제 환경이 있다. 병력·무기가 절실한 러시아, 전략적 완충지대가 필요한 중국이 북한에 손을 내미는 가운데 이란전쟁으로 외교적 돌파구를 꾀하는 트럼프까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만날 의향을 공개적으로 밝혔기 때문이다. 한미연합훈련도 대폭 축소됐다. 북한의 협상력이 한층 높아진 모양새다.
전경주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번 유엔 연설을 두고 “북한은 유엔과 대립하는 듯하지만, 사실상 유엔의 위상을 인정하고 이를 활용하고 있다”고 짚었다. 이어 “트럼프가 서구의 국제질서와 그 상징인 유엔을 부정하며 새로운 대안적 질서를 만들 수 있는 공간이 열렸다”며 “앞으로 유엔 등에서 소위 ‘불량국가’들이 목소리를 낼 공간이 더욱 확장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6월 16일 중국을 국빈 방문한 민 아웅 흘라잉(왼쪽) 미얀마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났다. 신화통신=연합뉴스
지난 2021년 2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민 아웅 흘라잉 미얀마 대통령도 ‘정상국가화’를 도모하고 있다. 시위를 잔인하게 진압해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 정상회의에서 배제되고 미국과 유럽연합(EU)의 제재를 받았지만, 흘라잉이 지난 4월 대통령에 취임한 뒤 기류가 변했다.
지난 16일 로이터통신은 안와르 이브라힘 말레이시아 총리가 흘라잉에게 공식 방문을 제안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그간 말레이시아는 미얀마를 강도 높게 비판했지만, 자국 내 로힝야(미얀마 소수민족) 난민 송환이 시급해지자 입장을 바꾼 것이다. 태국 역시 지난달 흘라잉을 국빈 초청해 레드카펫을 깔고 성대히 맞았다. 미얀마와 2400㎞ 국경을 접하고 있어 마약·스캠 등 국경 범죄 대응 협력 등이 절실해진 탓이다.
미얀마를 인도양 진출의 교두보로 삼으려는 중국은 지난 6월 이미 정상회담을 했고, 중국 견제를 위해 미얀마의 협력이 필요한 인도는 앞서 5월 흘라잉을 초청했다. 미국 역시 관계 개선을 고심 중이다. 미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는 “트럼프 행정부는 희토류 확보를 위해 미얀마 군사 정권과 협력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박경민 기자
지난 2021년 8월 아프가니스탄을 재장악한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의 활동 반경도 넓어졌다. 여성인권 탄압 등으로 악명 높지만, 미국 워싱턴근동정책연구소에 따르면 탈레반은 재집권 5년간 103개국·기구와 3651건 접촉했다. 올해 들어선 중국·인도·카타르 등을 잇달아 만났고, 지난 5월에는 러시아와 군사기술협력 협정까지 체결했다. 각국이 노리는 건 아프간의 광물 이권과 물류·에너지 수송로 확보다. 이런 흐름 속에서 압둘 카하르 발키 탈레반 대변인은 미 CBS 인터뷰를 통해 미국과도 수교를 원한다고 밝혔다.
바샤르 알 아사드 독재정권을 몰아내고 2025년 집권한 아메드 알샤라 시리아 대통령은 무려 143억원 현상금이 걸려있던 테러리스트 출신인 데다 종파 학살 등으로 비난받았으나, 최근 외교 보폭을 넓히고 있다. 7월 미국·국제원자력기구(IAEA)와 아사드 정권 시절 핵물질 제거에 합의했고, 지난달 시리아는 미국이 1979년 지정한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해제됐다. 중동에서 이란을 간접적으로 압박하려는 미국의 계산이 반영된 결과다. 2015년 시리아 내전으로 난민 사태를 겪은 유럽 역시 난민 유입 등을 막기 위해 시리아 새 정부에 우호적이다.
지난 23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총회에서 연설 중인 아메드 알샤라 시리아 대통령. AP=연합뉴스
이들 ‘불량국가’의 귀환은 가치외교보다 자원안보 등 ‘실리’가 중요해진 국제사회의 최근 분위기를 보여준다. 가디언은 탈레반의 외교적 위상이 높아진 데 대해 “역내 안보 우려, 불법 이민을 줄이려는 서방의 고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평가했다.
무엇보다 세계가 다극화하면서 서방이 인권 탄압 등을 이유로 제재를 가해도 중국과 러시아가 힘을 실어주는 탓에 그 효과가 약해졌다. 자유유럽방송은 “중국·러시아가 약점을 보완해주는 덕에 (제재를 받는 국가가) 서구의 압박을 일부 상쇄할 수 있게 됐다”고 짚었다.
그러나 국제사회가 이들을 완전히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북한과 미얀마에 대한 서방의 제재는 여전하고, 탈레반의 공식 승인국도 러시아 한 곳 뿐이다. 실리 추구 외교에 대한 우려도 높다. 뮌헨안보회의는 올해 보고서에서 “원칙에 기반한 협력 대신 ‘거래’가 중요해진다면, 지역 패권국이 세계를 좌우하게 될 수 있다”며 “역설적으로 강자에게만 유리할 것”이라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