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리가 낮은 계좌를 찾아내고 더 나은 조건의 예금으로 갈아타도록 돕고. 이런 인공지능(AI) 발달이 은행의 예금의 수익 기반을 흔들 수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29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토르스텐 슬록 아폴로 글로벌 매니지먼트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AI의 도움으로 저금리 예금자들이 고금리 상품으로 이동하기 시작하면 은행의 자금 조달 기반이 흔들릴 수 있다고 밝혔다. AI 비서가 고객의 현금을 금리가 낮은 계좌에서 더 높은 금리를 주는 계좌로 수시로 옮기면서, 은행의 저원가성 예금이 빠져나가는 이른바 ‘AI발 뱅크런’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경고다.
은행은 그동안 예금자들이 금리를 꼼꼼히 비교하거나 계좌를 바꾸지 않는 관성에 기대 낮은 비용으로 자금을 조달해왔다.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에 따르면, 이자가 거의 붙지 않는 미국 소비자와 기업의 당좌예금은 약 7조1200억 달러(약 9600조원)에 달한다. 이런 관성적 예치를 AI 에이전트가 깨뜨릴 수 있다는 게 슬록의 경고다. 실제 미국에서는 지난주 메타 플랫폼스가 AI 비서 ‘뮤즈(Muse)’를 출시한 뒤 대형·중소형 소비자은행을 포함한 금융주가 하락하기도 했다.
한국도 저금리 예금 규모가 작지 않다. 30일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2026년 7월 말 예금은행의 저축예금 잔액은 324조7442억원, 요구불예금 잔액은 356조2407억원이다. 만기 없이 비교적 자유롭게 입출금할 수 있는 두 예금의 잔액을 합치면 약 681조원이다. 이들 상당수 상품의 기본금리는 연 0.1% 안팎이거나 그보다 낮다. 일부 은행의 보통예금·저축예금 금리는 연 0.01~0.05% 수준이다. 이같은 초저원가성 예금이 줄어들면 은행은 그만큼 더 비싼 비용을 들여 자금을 조달해야 한다.
다만, 중소형 은행이 발달한 미국과 달리 한국의 경우 대형 시중은행과 지방은행의 과점형태로 시장이 형성돼 있어, 예금 이동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을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AI의 발전과 활용도가 금융소비자 활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예의주시하고 있다"며 “AI를 활용한 정보의 취득 및 확산, 활용도가 갈수록 높아져 금융소비자의 민감도가 높아진 만큼 AI 에이전트 등이 현실화될 경우 민감도의 반응속도 및 규모가 더욱 즉각적이고 심화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은행의 자금 조달과 이자 수익 구조가 바뀌면 소비자의 대출 부담도 같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존 캠벨 하버드대 경제학 교수는 WSJ과의 인터뷰에서 “소비자의 관성은 금융 산업을 형성하는 데 매우 강력한 힘이 되어 왔다”며 “대출기관들이 줄어든 이자 수익을 만회하기 위해 신규 주택담보대출 금리를 높일 가능성도 있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