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친융(콜리 황·黃欽勇) 디지타임스 회장이 지난 15일 서울 종로구의 한 호텔에서 “산업이 성장할수록 타인의 기술을 빼앗는 추격보다 국제 규칙에 따른 경쟁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영근 기자
“기술 하나를 훔친다고 산업 전체를 가져갈 수는 없습니다.”
황친융(콜리 황·黃欽勇) 디지타임스 회장은 지난 15일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대만의 기술유출 문제를 이렇게 봤다. 40년간 대만 전자산업을 분석해온 그는 대만 역시 중국 등으로의 기술·인재 유출을 우려하지만, 개별 사건이 산업 전체를 흔들 가능성은 제한적이라고 진단했다. 파운드리와 설계·후공정·서버 등 산업 생태계가 여러 층으로 분산돼 있어서다. 그는 “한국의 진짜 취약점은 인재 이탈보다 메모리 중심의 기술·사업 포트폴리오 집중”이라고 진단했다.
황 회장은 TSMC의 강력한 방어막도 단순한 보안 규정이 아니라 복잡한 조직과 사업 구조에 있다고 설명했다. TSMC의 연구개발 인력은 2000년 무렵 약 200명에서 현재 1만1000명 수준으로 늘었다. 고객은 500곳이 넘고, 서로 다른 공정을 다루는 프로젝트와 팀도 500~600개에 이른다. 한 엔지니어가 회사 전체 공정과 노하우를 파악하기 어려운 구조다. 그는 “예전에는 팀이 8개 정도라 서로 무엇을 하는지 알기 쉬웠지만 지금은 팀 간 소통조차 쉽지 않다”며 “조직 자체가 일종의 자동 방화벽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일부 기술을 손에 넣는다고 생산능력까지 곧바로 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황 회장은 “칼을 훔쳐도 그 칼이 좋은지, 언제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를 수 있다”고 비유했다. 기술 자체뿐 아니라 이를 양산에 적용하는 노하우와 공급망, 고객 관계 등 축적된 생태계가 경쟁력을 좌우한다는 의미다.
중국의 기술 확보 공세가 거세지면서 대만 정부도 제도적 방어선을 높이고 있다. 2022년 국가안전법을 개정해 국가핵심기술의 해외 유출을 경제간첩 행위로 처벌할 수 있도록 했고, 2025년 TSMC 2나노 기술유출 사건과 2026년 ‘블루오션 프로젝트’ 수사에서 관련 조항을 잇따라 적용했다. 황 회장은 “미·중 관계 악화로 대만이 중국과 기술교류를 줄이고 제3국 협력을 늘릴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다만 황 회장은 기술유출을 막는 것만으로 경쟁력을 지킬 수는 없다며 ‘정공법’을 강조했다. 그는 “중요한 것은 계속 새로운 기술과 사업모델을 만드는 것”이라며 “기존 기술을 지키는 동시에 남들이 쉽게 복제할 수 없는 다음 기술을 앞서 개발하고, 지식재산권과 국제 규칙을 지키는 생태계를 주도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