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대미투자 관련 보고를 하고 있다. 뉴시스
10개월 넘게 이어진 한·미 협상 끝에 총 20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전략투자가 실제 집행 단계에 들어간다. 정부는 1호 프로젝트인 미국 텍사스 엔시날 가스복합화력발전소 사업에 이달 23억~24억 달러를 처음 송금하고, 후속으로 미국 내 대형 원자력발전소 8기를 건설한다.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사업은 상업성 검토가 필요해 추진 여부를 확정하지 않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사실상 확정된 사업으로 소개해 논란이 예상된다.
한·미 양국 정부는 1일 ‘한·미 전략적 투자 양해각서(MOU)’에 따른 대미 전략투자 프로젝트 추진계획을 공식 발표했다. 양국이 지난해 7월 큰 틀의 관세 협상에 합의한 지 약 14개월, 같은 해 11월 전략적 투자 MOU를 체결한 지 약 10개월 만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30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오늘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에너지 인프라 투자 중 하나를 발표하게 돼 매우 기쁘다”며 “우리 행정부가 한국과 체결한 합의에 따라 한국은 최대 2000억 달러를 투자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텍사스 발전소와 대형 원전 8기를 차례로 언급한 뒤 “오랫동안 기다려온 알래스카 LNG 파이프라인도 있다. 이것은 큰 사업”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특히 댄 설리번 알래스카 상원의원을 소개하며 “그는 알래스카 파이프라인을 거의 20년 동안 추진해왔고, 이제 우리가 이를 해내고 있다(we’re now getting it done)”고 강조했다.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은 “한국이 알래스카 LNG 개발 프로젝트에 500억 달러 이상 투자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반면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지난달 22일 사전 브리핑에서 알래스카 LNG를 아직 투자 확정 사업으로 보기 어렵다고 했다. 김 장관은 “알래스카 LNG의 상업적 합리성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라며 “인허가 지연과 노동력, 날씨, 기술적 문제 등 여러 이슈가 있어 하나씩 따져볼 예정”이라고 말했다. 또 “상업적 합리성이 확인되는 경우에 추진한다는 분명한 원칙을 가지고 검토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223억 달러 텍사스부터…이달 첫 송금
대미 1호 투자 사업은 미국 텍사스주 엔시날 지역에 총사업비 223억 달러를 들여 약 6.5GW(기가와트) 규모의 가스복합화력발전소를 건설·운영하는 사업으로 확정됐다. 발전소에서 생산한 전력은 인근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에 공급한다. 정부는 조만간 23억~24억 달러 안팎을 처음 송금하고, 이후 주요 투자금을 3~4년에 걸쳐 투입한다. 소규모 집행까지 포함한 전체 투자 기간은 약 7년으로 예상된다.
다만 발전소 전력을 구매할 데이터센터와 전력구매계약(PPA)은 아직 체결되지 않았다. 정부는 전력 수요가 충분한 만큼 계약을 서두르기보다 유리한 조건을 확보하겠다는 입장이다. 김 장관은 “데이터센터를 짓고자 하는 수요가 많아서 전력 수요자보다 공급자가 우위에 있는 상황”이라며 “여러 수요자 가운데 가장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는 곳과 적절한 시점에 PPA를 체결하겠다”고 말했다. 미국 정부도 빅테크 등의 전력 수요 기업과 PPA 체결을 적극 주선하기로 했다는 게 정부 설명이다.
정부는 설계·조달·시공(EPC) 등 사업 전 사업 과정에 한국 기업을 참여시킨다는 계획이지만, 이 역시 확정된 것은 아니다. 김 장관은 “한국 기업이 EPC를 맡기로 계약된 것은 아니다”며 “주요 기자재뿐 아니라 주변 기자재 업체도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투자금 회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리스크 풀링(risk-pooling)’ 구조를 적용하기로 했다. 텍사스 발전소와 향후 추진할 원전 등 개별 프로젝트별 특수목적회사(P-SPV)를 우산형 투자목적회사(I-SPV) 아래 묶어 전체 사업의 손익을 함께 관리하는 방식이다. 특정 사업의 수익성이 떨어지더라도 다른 사업의 이익으로 이를 보완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한국이 전체 투자 원리금을 회수할 때까지 모든 프로젝트에서 발생한 수익은 한·미가 5대5로 나눈다. 원리금 회수가 끝난 뒤에야 한국과 미국의 수익 배분 비율이 1대9로 바뀐다.
대미투자 계획 주요 내용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 9월22일 국회 비공개 보고]
원전 8기 후속 검토…연내 최대 100억 달러 선지급 2호 프로젝트로는 한국형 APR1400 2기를 포함해 미국에 대형 원전 8기를 건설하는 ‘한·미 원전 프레임워크’에 합의했다. 전체 재원은 건설비 1000억 달러와 공사비 초과에 대비한 예비비 200억 달러를 합쳐 최대 1200억 달러다. 예비비는 실제로 사용하지 않더라도 한국의 대미 투자 이행액으로 인정하기로 했다.
구체적인 원전 부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대신 원자로 용기와 증기발생기 등 제작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장주기 기자재를 미리 확보하기 위해 연말까지 최대 100억 달러를 먼저 지급하는 방안이 추진된다. 김 장관은 “총론에는 합의했지만 프로젝트별 각론을 봐야 한다”며 “지반 조건과 용수 접근성, 전력 수요처와의 거리 등에 따라 사업비와 상업성이 달라질 수 있어 미국 측에 좋은 프로젝트를 제안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고 말했다. 반면 러트닉 장관은 “오하이오, 테네시, 사우스캐롤라이나, 켄터키 등에 건설될 것”이라고 원전 건설 지역을 일방적으로 구체화했다.
한국 기업이 웨스팅하우스 지분 5~10%를 인수하는 방안은 계속 협의한다. 김 장관은 “한국 기업들은 더 투자하길 바라지만, 웨스팅하우스에서 한국 측이 이사로 참여하는 건 부담스러워해 10% 이하 수준을 생각 중”이라고 설명했다.
알래스카 LNG는 확정 안 해…“상업성 떨어지는 건 사실” 미국 측이 참여를 요구해온 알래스카 LNG는 이번에 투자를 확정하지 않고 상업적 합리성을 추가로 검토하기로 했다. 알래스카 북부에서 생산한 천연가스를 남부까지 운송할 파이프라인과 LNG 수출 터미널을 건설하는 초대형 사업으로, 막대한 건설비와 혹독한 공사 여건 등으로 경제성 논란이 이어져 왔다.
김 장관도 사업성에 대한 우려를 인정했지만, LNG 도입 경로를 다변화한다는 측면에서는 검토할 전략적 가치가 있다고 설명했다. 김 장관은 “가스 도입 노선이 호르무즈·말라카·대만해협 등 특정 경로에 집중돼 있어 전체적인 수급 측면에서 취약하다고 보고 있다”며 “알래스카 LNG의 상업적 합리성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LNG 도입선을 다변화한다는 전략적 측면에서는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실제 투자를 결정할 경우 한국 기업에 유리한 사업 조건을 확보한다는 방침이다. 철강 등 관련 기자재의 관세를 낮추고 경제성 있는 조건의 장기 LNG 구매계약을 보장하는 한편 한국이 생산된 LNG에 우선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미국 측과 협의하기로 했다. 알래스카 사업이 추가되더라도 전체 대미 투자는 연간 200억 달러, 총 2000억 달러의 한도를 넘지 않도록 운영계약에 명시했다. 당초 미국 측이 제시한 알래스카 LNG 투자 규모는 670억 달러였는데, 이 경우 세 프로젝트의 총합이 대미 투자 한도인 2000억 달러를 넘게 돼 500억~600억 달러 수준으로 낮췄다.
김 장관은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가 추진되더라도 우리의 대미 투자 금액은 어떠한 경우에도 당초 미측과 합의한 총 2000억 달러, 연 200억 달러 송금 한도를 지킬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