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오후 4시 26분(현지시간) 백악관 집무실. ‘결단의 책상’에 앉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뒤로 더그 버검 내무장관,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 크리스 라이트 에너지장관 등이 섰다. 알래스카주에서도 마이크 던리비 주지사, 댄 설리번 상원의원(공화당 후보), 닉 배기치 하원의원 등 3명이나 참석했다. 한국의 2000억 달러 대미 투자 프로젝트를 발표하는 자리, 더 눈에 띄는 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없는 사람이었다. 집무실을 가득 메운 이들 중 투자 협상을 이끈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나 강경화 주미 대사 등 한국 측 인사는 한 명도 없었다.
없어서 눈에 띈 건 이뿐만이 아니었다. 57분간 이뤄진 행사에서 한·미를 뜻하는 “우리(We)”라는 언급은 없었고, 발표한 투자 프로젝트에 대한 “합의”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날 트럼프가 발표한 대미 투자 프로젝트에는 한국 정부가 수익성 등의 문제로 장기 검토 대상으로 분류한 사업들까지 포함됐다. 중간선거를 불과 34일 남겨두고 이뤄진 일방적 발표에서는 격전지에 대한 투자금 숫자만 부각됐을 뿐 동맹에 대한 존중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지난달 30일(현지시간) 한국의 대미 투자 프로젝트를 발표하며 알래스카주 연방 상원의원 선거 공화당 후보인 댄 설리번 상원의원의 손을 잡고 축하하고 있다. 이날 발표에는 한국 정부가 아직 검토 중인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도 확정된 것처럼 포함됐다. EPA=연합뉴스
이날 발표된 프로젝트 중 양국이 합의했다고 할 수 있는 건 정부가 국회에 ‘1호 투자 대상’으로 보고한 텍사스 엔시날 가스복합화력발전소(220억 달러) 건설뿐이었다. 하지만 트럼프는 정부가 아직 투자 여부를 결정하지 않은 8기의 원전 건설(1200억 달러)과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프로젝트 참여(500억 달러)까지 확정된 것으로 발표했다.
이와 관련, 이재명 대통령은 1일 X(옛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미국이 발표한 대미 투자 사업 중 알래스카 LNG 사업은 상업성이 확인되고 대한민국의 법 절차에 부합하는 것을 전제로 ‘working’에 착수하기로 했다”며 “원자력발전소 역시 구체적 발전소 단위로 상업성이 보장돼야 한다”고 밝혔다. ‘working’은 구체적인 사업성 검토와 후속 협의를 뜻하는 것으로, 미 측 발표와 달리 두 사업은 확정된 게 아니라 검토 중이라는 점을 대통령이 직접 확인한 셈이다. 산업부도 이날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에 관해 “투자 여부나 규모에 대해서는 정해진 바가 없다”며 “검토에 착수한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 트럼프가 발표에서 쓴 표현을 봐도 모든 게 한국과 합의한 결과라는 명시적 확인은 없었다. 트럼프는 “오늘 우리는 한국과 우리 행정부가 체결한 합의들(agreements) 덕분에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 중 하나인 에너지 인프라 투자를 발표하게 돼 기쁘다”라며 ‘합의’라는 표현을 쓰긴 했다. 하지만 그가 언급한 합의는 대미 투자와 관세 인하를 맞바꾼 지난해 무역 합의를 지칭한 것이지, 대미 투자 프로젝트의 세부 내용에 대한 한·미 간 합의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러트닉 역시 “해당 프로젝트들은 한국 정부가 전액 자금을 대고, 비용을 부담하며, 그 혜택은 미국이 누리게 된다”고 말했다. 문제의 알래스카 LNG 사업에 대해서도 트럼프와 러트닉은 “거래(deal)”라고 부르면서 한국 정부가 이에 합의했다는 설명은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트럼프는 “우리가 한국과 맺은 무역 합의에 따라 그들(they)은 수천억 달러를 투자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언급한 “우리”는 한·미가 아닌 미국이었고, 한국은 “그들”이었다. 트럼프는 “그들이 최대 2000억 달러를 투자할 것”라고 거듭 말했다.
이날 발표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대미 투자를 대가로 관세를 낮춘 일본의 대미 투자 프로젝트 발표 때와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미·일의 경우 지난 2월 투자 사업을 처음 발표했다. 러트닉은 2월 17일 성명에서 오하이오 천연가스 발전시설 약 333억 달러 투자 등 3개 프로젝트를 트럼프가 승인했다며 “오하이오에서 일본과 함께 우리는 거대한 천연가스 시설을 개발할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 외무성도 2월 18일 ‘미·일 간 전략 투자 구상에 따른 1차 프로젝트 선정’이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통해 미국이 발표한 것과 같은 3개 투자 사업을 그대로 소개했다. 미·일이 해당 사업들에 “합의했다(concurred)”면서다.
또 시차를 고려하면 이는 사실상의 동시 발표였다. 한국의 경우 전날 로이터통신 등이 백악관의 발표 예정 소식을 보도할 때까지도 미국으로부터 구체적인 발표 일정이나 내용 등을 전달받지 못했다고 한다. 미·일은 지난 3월 2차 발표 때는 아예 공동 발표 형식을 취했다.
미국이 발표한 투자 액수도 비교되는 지점이다. 한국의 경우 이날 약속한 2000억 달러 투자액에 해당하는 사업을 전부 발표했지만, 일본은 전체 투자액 5500억 달러 가운데 1차 때 360억 달러, 2차 때 730억 달러에 해당하는 사업만 발표했다.
가장 큰 차이는 트럼프가 직접 등판했다는 점이다. 발표하는 자리에 각료 3명에 알래스카 공화당 정치인까지 잔뜩 대동한 채다.
이는 중간선거 판세가 공화당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경제적 성과가 급한 트럼프가 한국의 대미 투자를 선거용으로 적극 활용한 것 아니냐는 해석에 힘을 싣는다. 아직 확정되지 않은 사업까지 기정사실화해 발표해버릴 정도로 위기의식이 심각하다는 뜻으로도 볼 여지가 있다.
실제 알래스카는 지난 2024년 대선에서 트럼프가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후보를 13.1%포인트 차이로 손쉽게 이긴 공화당 강세 지역이지만, 이번 중간선거에서는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 접전이 벌어지고 있다. 이날 행사에서 트럼프의 소개를 받고 등장한 설리번 후보가 “알래스카가 거의 반세기 동안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해온 프로젝트”가 성사됐다며 이를 통해 일자리 1만2000개를 창출할 수 있다고 강조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러트닉은 원전 8기 건설도 확정된 것처럼 밝히며 오하이오주, 테네시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켄터키주를 부지로 거론했다. 오하이오는 JD 밴스 부통령이 입각 전까지 상원의원을 지낸 곳인데, 지금은 상원 선거 격전지로 분류돼 있다. 워싱턴 DC에서 활동하는 한 로비스트는 “4년 전만 해도 오하이오는 말 그대로 민주당이 비빌 언덕이 없는 지역이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고 말했다.
트럼프는 지난달 28일에는 아이오와주에 다국적 민간 기업이 150억 달러 규모의 대형 제철소를 건설하는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최근 선거에서 공화당이 우세를 보여온 아이오와는 이번 선거를 앞두고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면서 중요한 승부처 중 한 곳으로 떠오르고 있다.
AP통신은 “트럼프가 접전 중인 상원의원 후보를 옆에 세운 채 540억 달러 규모의 알래스카 천연 가스 프로젝트를 대대적으로 부각했다”며 “이번 투자는 트럼프가 사흘 사이 두번째로 공화당 상원의원 후보들이 접전을 벌이는 지역에서 외국인 투자 성과를 부각한 사례”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