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금융지주사들의 자회사 최고경영자(CEO) 승계 절차가 본격화했다. 지난달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이 지주회장들을 호출해 ‘이너서클(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소수 권력층) 인사’를 경고한 만큼, 올해부터는 은행장 등 자회사 CEO 추천권을 자회사에 부여하는 모습이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
자회사가 CEO 후보 검증하고 최종 후보 선정에 개입
우리금융지주는 지난달 30일 자회사대표이사후보추천위원회(자추위)를 열고 은행장 등 자회사 CEO 승계 절차를 시작했다. 기존에는 지주회사 자추위가 은행장 등 자회사 대표 후보자를 추천하고 지주회사가 임명하는 구조였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자회사인 우리은행 산하 임원후보추천위원회(임추위)가 컨설팅사 등 외부 전문기관과 함께 후보자의 경영 성과 등을 검증해 추천하도록 했다.
우리금융 관계자는 “차기 CEO 후보자의 경영 성과 등을 자회사 내부는 물론, 외부 기관도 참여해 금융시장 전체가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검증할 계획”이라며 “승계 절차의 주요 단계별로 미리 기준을 마련해 선임 과정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높일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금융지주 역시 같은 날 지주 자추위를 열고 자회사 CEO 승계 절차를 본격화했다. 하나금융은 이미 지난 2024년부터 자회사인 은행 임추위에 차기 은행장 후보 추천권을 부여했다. 올해부터는 단순히 후보자를 추천하는 단계를 넘어 최종 후보군(숏리스트) 선정에도 은행 임추위원장이 참여해 의견을 개진할 예정이다.
BNK금융지주도 올해부터는 자회사가 CEO 후보를 추천할 수 있도록 했다. 또 내부 인사뿐만 아니라 외부 인사도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최근 3년간 회사의 경영 현황 자료 등을 제공하기로 했다. 신한금융지주는 앞서 지난달 21일 승계 작업에 돌입하면서 자회사에 후보 추천 권한을 부여하고, 자회사 실정에 맞는 CEO 자격 요건과 세부 평가 기준을 마련해 후보 심의에 활용토록 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KB금융지주의 경우, 이재근 지주회장 후보자가 아직 최종 선임되기 전이라 자회사 CEO 승계 작업이 늦어지고 있어 보인다”며 “KB와 NH농협금융지주 등도 다른 지주회사들과 비슷한 형태의 승계 구조를 마련할 전망”이라고 말했다.
정근영 디자이너
━
“자회사 권한 강화는 ‘구색 맞추기’” 지적도
금융권이 올해부터 일제히 자회사 CEO 추천권을 자회사에 부여한 것은 지난달 23일 금감원의 경고와 무관치 않다. 이 원장은 당시 “(자회사 CEO를 선임할 때) 특정계파나 친소관계에 매몰되지 않고, 능력에 바탕을 두고 선별해 달라”며 “지주회사는 자회사 임추위가 실질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할 것”이라고 콕 집어 강조했다.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이 지난달 23일 서울 여의도 금감원 본원에서 열린 은행지주회장 간담회에서 참석자들과 기념 촬영하고 있다. 왼쪽부터 정은정 금융감독원 은행감독국장, 황병우 iM금융그룹 회장, 이찬우 NH농협금융지주 회장, 함영주 하나금융지주 회장, 양종희 KB금융지주 회장, 이 원장, 조용병 은행연합회장, 진옥동 신한금융지주 회장, 임종룡 우리금융지주 회장, 빈대인 BNK 금융지주 회장, 김기홍 JB금융지주 회장, 곽범준 금융감독원 은행 부원장보. 연합뉴스
정부가 자회사의 경영을 책임지는 지주회사의 자회사 인사권을 제한하려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일종의 금융관치 성격이 짙다는 것이다. 김우진 서울대 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금융지주는 은행·카드·보험 등 자회사의 절대적인 지분을 갖고 있는데, 자회사 CEO 인사에 대한 개입을 제한하는 것은 기업 지배구조의 보편적 상식과 맞지 않다”고 비판했다.
다만 금융권의 움직임에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 형식적으로 자회사 임추위 권한을 강화하는 모양새를 취하는 것은 금융당국의 경고에 대한 ‘구색 맞추기’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자회사 임추위에 후보자 추천권을 부여했다고 해서, 지주회사의 후보 추천권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라며 “자회사와 지주회사가 추천한 후보자들이 경합한 뒤, 결국에는 지주회장이 최종 후보자 선임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주요 금융지주는 이달부터 자회사 CEO 후보자 검증을 시작해 다음 달쯤 숏리스트를 압축, 오는 12월에 최종 후보자 선정 작업을 진행할 전망이다. 전 금융권에선 70여개 자회사의 CEO 선임 절차가 올 연말까지 예정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