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에는 유독 책 읽는 여인을 그린 작품이 많다. 그 가운데 프라고나르(Jean-Honore Fragonard)의 ‘책 읽는 여인’(1769년께)은 18세기 로코코 미술이 여성의 독서를 어떻게 그렸는지 잘 보여준다. 이 시기 책 읽는 여성은 지적 주체라기보다 책에 빠져든 무방비하고 낭만적인 모습으로 그려졌고, 그 모습은 곧 관람자가 바라보고 음미하는 아름다운 대상이었다. 화가는 샛노란 드레스와 발그레한 뺨, 목선을 감싸는 주름 잡힌 칼라로 우리의 시선을 인물의 몸과 옷감의 질감으로 이끈다.
책을 멋지게 여기는 Z세대 취향
독서의 명맥 살아 있어 반갑지만
만남 위한 스펙으로 여겨선 곤란
프라고나르, ‘책 읽는 여인,’ 1769년께.
이처럼 스스로 지적인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은 일상에서 왕왕 책 읽는 사람에게 끌리는 마음으로 나타난다. 지성을 지닌 타자에 대한 욕망이다. 최근 서울의 대형 서점을 중심으로 번지고 있는 ‘번따(번호 따기)’ 유행은 언뜻 우스갯소리처럼 들리지만, 위 그림 속 ‘책 읽는 여성은 아름답다’는 전제의 현실판이라 할 만하다. 타자의 독서 행위를 통해 자기 동일화를 꿈꾸는 것이다. 상대가 몰두한 책 한 권으로 그의 지적 수준과 성향까지 읽어 내려는 이 시선은 독서 문화의 타락일까, 아니면 새로운 진화일까.
요즘 바야흐로 활자가 멋이 된 시대를 맞고 있다. ‘텍스트힙’이라는 말은 ‘글자(text)’와 ‘개성 있다(hip)’는 뜻을 합친 신조어다. 디지털 환경에서 자란 Z세대가 아날로그적 독서를 드물고도 멋진 행위로 여기고, 이를 자신의 정체성과 취향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삼으며 퍼져 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들에게 독서는 더 이상 혼자 즐기는 조용한 취미에 머물지 않는다. 책을 매개로 공감을 나누고 관계를 맺는 일종의 네트워킹으로 넓어지고 있는데, 서점에서 벌어지는 번따 역시 이 흐름의 연장선에 있다.
오늘날의 서점은 더 이상 침묵이 흐르는 정적인 공간이 아니다. 카페와 전시, 강연이 어우러진 복합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했고, 성수동과 망원동 거리의 독립서점과 북바는 혼자 머무는 쉼터이자 때로는 낯선 이들이 책과 생각을 나누는 사교의 장이 된다. 수치도 이를 뒷받침한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25 국민 독서실태 조사’에서 성인 독서율이 38.5%로 떨어지는 동안 20대만 75.3%로 반등했다. 올해 6월 서울국제도서전에도 주최 측 추산 15만 명이 몰렸고, 그 가운데 2030세대의 비중이 높았다. 필사와 책 꾸미기 같은 유행은 디지털 과잉 자극에서 벗어나 느리게 사유하려는 의지로도 읽힌다. 겉으로만 보면 독서 문화가 화려한 부흥기에 접어든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젊은이에게 책이 읽는 대상이라기보다 들고 다니며 과시하거나 SNS에 인증하는 소품이 되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AI나 SNS를 통해 책의 간추린 요약을 습득할 뿐, 긴 시간을 들여 직접 완독하려 하지 않고, 텍스트보다는 북커버·책갈피·굿즈 같은 사물의 소비로 끝나버린다. 이를테면 어느 유통업체와 출판사가 손잡고 내놓은 ‘문학 빵’에서 화제가 된 것은 빵이 아니라, 세계문학전집과 시집 표지를 캐릭터로 새로 그린 투명 책갈피였다. 소비자가 사는 것은 문학이 아니라 문학의 표지인 셈이다. 업계 안에서도 이런 상품 소비가 독서와 연결되는지 확신하진 못한다. 그런 면에서 텍스트힙은 책을 사유의 매개에서 물질적 액세서리로 끌어내린 타락 혹은 변종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텍스트힙을 독서의 진화냐 타락이냐로 가르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시각이다. 이 흐름에는 두 얼굴이 함께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선 자극적인 영상과 즉흥적인 만남이 판치는 시대에 책을 매개로 사람이 이어진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염불보다 잿밥”이라고, 진지한 독서 교류에서 자양분을 얻기보다 취향을 스펙처럼 훑으며 만남에만 마음을 둔다면 책은 한낱 도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텍스트힙, 이 예기치 못한 독서 문화의 새로운 트랜드는 장차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까. 앞날은 누구도 예단하기 어렵지만, 책이 아직 명맥을 잇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일단 안도할 일이다. 그러나 “이제 종이는 죽었다, 화장지만 빼고”라던 백남준의 말이 불길한 예언처럼 떠오르는 것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