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태어난 아기는 몸뚱이를 누에고치처럼 꽁꽁 싸매야 편안해 한다. 아직 스스로 가누지 못하는 팔다리가 움직이면 불안해서 울음을 터뜨린다. 버둥대는 자신의 팔다리가 불안해서 운다니, 귀엽다. 아무래도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느 정도 구속이 있어야 편안한 존재인 것 같다. 적당한 통제 속에서 성장기를 거치고 어른이 되면 자유와 함께 불안이 찾아온다. 어른이 되면 불안하다고 울어도 귀엽지 않다. 어른은 스스로 팔다리를 적당히 동여매어 자신의 불안을 다스려야 한다.
모친의 학대에서 생겨난 환각 공포
그림 그려 대면하는 방어기제 작동
남근 형상의 ‘천 조각’ 등 파격 작업
뉴욕의 남성 화가들 열광하며 표절
자살 충동 치료받으며 작업 강행
1989년 회고전 계기, 인기 작가 반열
‘무한 그물’, 1960. 발표 당시에 프랭크 스텔라가 75달러에 구입했다. 현재 워싱턴 국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불안을 해결하는 강력한 전략이 통제이다. 불안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자유를 기꺼이 포기한다. 루틴을 만들고,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하는 직장인이 된다. 반복과 통제를 통해 안정감을 획득한다. 삶에 패턴을 부여한다. 반면 자유를 추구하며 불안을 감내하는 이들도 있다. 대표적인 이들이 예술가들이다. 어떤 예술은 불안을 토대로 잉태되고 자라나기도 한다. 얼마 전에 타계한 구사마 야요이의 경우가 그렇다. 그는 극심한 불안을 예술로 분출하고 다스리면서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보적인 세계를 구축해냈다.
‘천개의 보트’, 1963년. 남근 형태의 ‘부드러운 조각’으로 보트를 가득 채우고 이 보트의 흑백사진 999장을 인쇄해 전시장 전체를 도배했다. 앤디 워홀이 벽지의 설치 방식을 모방했다고 여겨진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열 살 무렵 찾아온 환각 1929년생인 구사마는 일본 마츠모토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쪽이 종자 도매업을 운영하는 부유한 집안으로, 아버지가 데릴사위로 들어와 성을 바꾼 경우였다.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부부 사이는 좋지 않았다. 아버지는 외도를 일삼았고, 어머니는 항상 화가 나 있었다. 4남매 중 막내딸이었던 구사마에게 어머니는 수시로 분풀이를 했고, 아버지를 미행하는 일까지 시켰다. 안 그래도 예민했던 그에게 어머니의 정서적 학대와 가정 내 긴장감은 심리적 불안을 가중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구사마 야요이가 처음 환각을 마주한 것은 열 살 무렵이었다. 자서전과 인터뷰를 통해 밝힌 두 가지 일화는 그의 작업 세계를 이해하는 데 특히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하나는 식탁보의 붉은 꽃무늬가 무한히 증식해 방 전체와 자신의 몸을 집어삼키듯 뒤덮어버리는 환각이었다. 당시 그는 끝없는 공간 속으로 흡수되어 소멸할 것 같은 극심한 공포에 휩싸였다. 또 다른 경험은 꽃밭에서 일어났다. 집안의 종묘 농장에서 수만 송이의 꽃을 일상적으로 마주하던 그는 어느 날 제비꽃밭에 들어섰다가, 꽃들이 저마다 사람의 얼굴을 한 채 일제히 말을 걸어오는 환각을 겪었다. 귀가 찢어질 듯 커다란 목소리로 아우성치는 꽃들의 소리에 그는 극도의 공포를 느끼며 도망쳤다고 한다.
이 무렵부터 그는 환각 속 이미지들을 끊임없이 그려내면서 내면의 불안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구사마에게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실체 없는 공포를 눈앞에 구체화함으로써 통제 가능한 대상으로 바꿔 놓는 필사적인 방어기제였다. 끝없이 증식하는 패턴과 그 속에서 존재가 소멸되는 듯한 환각의 경험은 구사마 예술의 근간이자 본령이 되었다. 한편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고등학교 시절에는 강제 노역에 동원돼 군수 공장에서 낙하산 꿰매는 일을 하기도 했다. 공급 경보가 울리고 군용기가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긴장감 속에서 매일 장시간 앉아 바느질을 하는 고된 노동이었다. 그러나 이때 익힌 재봉 기술은 훗날 천과 솜으로 ‘부드러운 조각’을 제작할 때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종전 후, 구사마는 결혼을 하라는 어머니의 압박을 거부하고 교토 미술대학에 입학했다. 재능이 워낙 뛰어나 전시회도 여러 차례 열었지만 일본 미술계의 보수적인 분위기가 갑갑하게 느껴졌다. 서양의 전위 미술에 특히 관심이 많았던 구사마는 나이 스물여덟에 일본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때까지 그린 2000여 점의 그림을 모두 불태우고 기모노 안감에 달러 지폐를 꿰매어 넣은 후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무한 거울방-남근의 들판’, 1965. 뉴욕 카스텔란 갤러리에서 발표한 ‘무한 거울방’의 최초 버전이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뉴욕에서 폭발한 자유로운 기질 1958년에 시작된 뉴욕 생활은 그동안 억눌려 있던 자유로운 기질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15년의 체류 동안 누린 자유에는 대가가 따랐다. 예술가로서 극적인 부침을 겪으며, 그의 불안정한 정신이 한층 더 피폐해진 것이다.
초반에는 관심과 환대를 한 몸에 받았다. 1960년대 뉴욕 미술계의 자유롭고 전위적인 분위기에서 그녀는 물 만난 고기처럼 야망을 한껏 펼쳤다. 이 시기의 구사마는 그물 모양의 붓질을 화면 전체에 반복한 ‘무한 그물’ 회화, 솜으로 채운 천을 남근 형상으로 만들어 사물과 조합한 ‘부드러운 조각’ 등을 선보였다. 개성 넘치고 독특한 그녀의 작품에 많은 동료 작가들이 매혹되었다. 도날드 저드, 프랭크 스텔라가 당시 그녀의 회화를 구입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구사마는 애매한 위치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독창성은 동료 화가들의 감탄을 자아냈지만 결정적인 성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동양인 여성이라는 조건은 분명한 한계로 작용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선보이면, 더 유명한 백인 남성 화가가 몇달 후 비슷한 것을 발표하여 성공하는 일이 몇 차례나 이어졌다. 그 대표적인 예가 클래스 올덴버그와 앤디 워홀이었다. 올덴버그는 구사마와 함께 그룹전에 참여한 이후, 천으로 만든 부드러운 조각 아이디어를 자신의 개인전에서 선보이며 큰 주목을 받았다. 워홀은 전시장 벽을 패턴으로 도배한 구사마의 설치 방식을 칭찬해 놓고, 몇 년 후 거의 똑같이 따라 했다. 독창적인 아이디어 자체보다는 작가의 인지도와 화단의 역학 관계가 작동하면서 이방인이자 여성인 구사마는 철저히 소외되었다.
1965년, 구사마가 그 유명한 ‘무한 거울방’을 처음 선보인 때도 마찬가지였다. 전시장에 여러 개의 거울을 설치하여 이미지가 끝없이 반복되어 펼쳐지는 듯한 환영을 만들어 낸 파격적인 시도였다. 7개월 뒤, 루카스 사마라스라는 작가가 대형 화랑인 페이스 갤러리에서 유사한 작품을 발표하자 구사마는 크게 낙담했다. 이런 일이 지속되자 구사마는 멘탈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60년대 말에는 반전 시위와 성해방 운동이 거세게 일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파격적인 나체 퍼포먼스를 벌여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70년대의 보수화 분위기 속에서 구사마는 점차 설 곳을 잃었다. 불안감에 점점 대중의 관심을 갈구하고 과격한 행동을 반복하면서 그녀가 초기에 쌓은 명성도 서서히 무너졌다.
1973년, 구사마는 경제적 어려움과 과로, 자살 기도로 얼룩진 우울한 시기를 보내다가 결국 일본으로 돌아갔다. 귀국 후에도 극심한 우울과 자살 충동에 시달리던 그는 1977년 도쿄에 있는 병원에 자진 입원했다. 불안을 다스리기 위해 누구보다 엄격한 자기 구속을 실행한 셈이다.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된 이후에는 병원 근처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그리고 낮에는 출근하여 작업에 몰두하고 밤에는 병원에 돌아와 치료와 휴식에 전념하는 철저한 루틴을 만들었다. 이 통제된 일상은 그녀가 이후로 수십 년 간 불안을 다스리며 작업을 지속할 수 있는 토대가 되어 주었다.
1970년대와 80년대, 구사마는 미술계에서 완전히 잊힌 이름이었다. 그런데 80년대 말, 60년대의 뉴욕 아방가르드 미술을 재검토하는 움직임 속에서 구사마의 존재가 재조명되었다. 1989년에 뉴욕에서 구사마의 회고전이 열리자 구사마의 선도적인 시도들이 역사적인 재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1993년, 구사마는 베니스 비엔날레 일본관의 단독 대표가 되어 세계 무대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 이후로 구사마는 예술적, 상업적으로 성공 가도를 달렸다. 직관적이고 단순하면서 시각적으로 강렬한 그의 작품은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무한 거울방’은 전세계 미술관을 투어하며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구사마 현상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작품가는 계속 올라가 생존하는 여성 작가로 가장 높은 경매 기록을 세웠다.
‘호박’, 2006,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작가에게 호박은 유머러스하면서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대상으로 스스로를 투영한 일종의 자화상이었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더 큰 세계로 연결되는 소멸 사실 구사마의 작업은 지극히 단순하다. 점과 망의 패턴, 꽃과 호박 등의 식물 이미지, 무한증식의 구조가 핵심이다. 사랑·영혼·무한·영원·우주 등의 단어를 사용한 작품의 제목들도 천진하기 그지없다. 메시지는 분명하다. ‘나’라는 개별 존재는 무한한 우주의 일부이며, 세상 만물이 긴밀히 연결돼 있다는 것. 이는 무한한 공간과 영원한 시간 속에서 명멸하는 모든 존재들을 향한 애정이기도 하다. 이 단순한 작품들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를 작품 자체에서만 찾기는 어렵다. ‘무한 거울방’ 앞에 늘어선 줄의 상당 부분은 사진 한장을 위한 것이고, 명품 브랜드와의 협업이 만들어낸 소비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평생 내면의 고통과 싸워 온 작가의 생애에 대한 이해와 지지도 깔려 있을 것이다. 그 힘겨운 투쟁의 역설적 결과물로서, 구사마 예술의 밝고 화려한 외양과 낙관적 메시지가 설득력을 얻는 것이다.
구사마의 예술에서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만들어진 패턴의 반복 속에서 결국 ‘나’라는 존재의 개별성이 사라진다는 지점이다. 어린 시절의 환각 속에서 경험한 자기 소멸은 공포였지만, 삶의 굴곡을 겪으며 불안과 싸워나가는 과정에서는 오히려 해방이자 구원이 아니었을까?
내면의 불안과 싸워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소멸이 곧 더 큰 세계로의 연결이 될 수 있다는 말은, 비록 클리셰라 하더라도 위안이 된다. 그 소멸이 죽음을 의미한다고 해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