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1주년 기자회견(6월 8일)에서 반도체 호황으로 크게 늘어난 세수 활용 방안에 대해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국가부채를 갚자는 건 바보 같은 짓.” 6·3 지방선거 직후였다. 지지율이 50%를 훨씬 넘고, 코스피는 8000선을 뚫고 9000을 향해 달리던 무렵이었다. 강력한 대통령의 말이 곧 정책이 되는 시기였다. 경제학자들도, 재정학자들도 “(초과세수로) 국채 상환은 바보짓”이라는 대통령 말에 입을 다물었다. 미래대응기금 162조원(2027년 예산안 기준)은 그렇게 탄생했다.
막대한 초과세수에도 나랏빚 늘어
‘미래 성장’ 관련 적은 사업도 지출
104조원 이상 그냥 ‘여유자금’
그런데 정부 재정 계획을 들여다보면 이상한 게 한둘이 아니다. 첫째, 이렇게 세수가 넘쳐나는데 정부는 빚을 더 낸다. 정부 계획상 내년에 국가채무는 106조원 더 늘어난다(1413조8000억원→1519조8000억원). 빚이 많은 형편에서 추가로 생긴 수입을 따로 쟁여두고 빚을 더 늘리는 일은 일반 가정에서도 안 한다. “결국 국채를 발행해 기금에 채워 넣는 것과 뭐가 다르냐”는 학계 주장이 그다지 지나친 것 같지 않다.
둘째, 용도. 이 대통령은 그날 “반도체 같은 새 성장 동력을 발굴하고 잠재성장률 회복에 장기 투자하는 방향”을 말했다.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정부 계획엔 국민생활편의 복합센터(1조5000억원) 등 일반예산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뒤섞여 있다. 게다가 아동기본수당 2조9000억원, 농어촌 기본소득 1조2000억원도 들어 있다. 이 대통령의 ‘기본사회’ 구상의 요소들이다. 이들이 미래 성장을 위한 것인가. 이런 사업엔 앞으로도 돈이 계속 나갈 수밖에 없다. 반도체 호황은 몇 년 안 가 끝날 텐데, 그때는 어떡하나. ‘일시적 세수로 영구적 지출을 떠받치는 구조’, 재정학자들이 꼽는 대표적 악성 조합에 해당한다. 호황이 끝나면 사업비 지출 부담은 미래 세대가 떠안는다.
셋째, 정말 이상한 것은 미래대응기금 162조원 중 내년 사업비는 45조원, 나머지 ‘104조원+α’는 여유자금으로 둔다는 점이다. 자본시장에선 그 돈을 노리는 금융회사들의 혈투가 벌어질 거다. 이 돈을 어떻게 관리할지 목표도, 책임도 명확하지 않다. 행정부가 이런 ‘백지수표성 기금’을 받아두는 일은 일찍이 없었다. 그야말로 정권의 쌈짓돈이 될 거라는 국민의 우려를 어떻게 불식할 것인가. 이미 이 대통령이 명절 때 농축산물 할인 지원에 미래대응기금을 활용하자는 제안을 내놨다.
넷째, 정부가 세금을 쓸 때는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 통제를 받는 것이 헌법에 규정된 원칙이다. 그러나 미래대응기금엔 구멍이 많다. 가령 100조원 넘게 따로 떼놓는 여유자금은 국회의 사전통제 밖에 놓인다. 게다가 정부는 애초 예상보다 더 걷힌 초과세수를 미래대응기금에 쌓을 수 있게 할 방침이다. 이를 위해 초과세수는 국채 상환 등에 쓰도록 용도를 엄밀하게 규정해 놓은 국가재정법을 고치겠다고 한다. 이러면 법률과 의회에 의한 재정 통제는 무력화된다.
다섯째, 기금이 적절하게 운용되는지를 심사하는 미래대응기금운용심의회 위원장을 기획예산처 장관이 맡는다. 심의위원도 장관이 정한다. ‘셀프 심의’다. 북해 유전으로 나라가 돈벼락을 맞은 노르웨이는 석유 수입 전액을 국부펀드에 넣는데 그것의 최고책임자는 민간 전문가다. 원금은 손대지 않고 운용 수익을 꺼내 쓴다. 규율과 통제가 엄격하게 작동한다. 우리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미래대응기금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학자들도 입을 열고 있다. 최근 한국경제학회 패널 설문조사에서 ‘예상보다 세수가 크게 증가했을 때 최우선 활용 방안’으로 응답자의 50%가 ‘국가채무 감축을 통한 재정 건전성 개선’을 꼽았다. 그들은 과연 ‘바보’인가.
여윳돈이 생겼을 때 빚부터 갚는 것, 그게 경제의 상식이다. 돈을 쓰자면 현금을 나눠주기보다 진짜 성장 동력을 키우는 데 써야 한다. 그것도 상식이다. 5년 정권이 무한한 정권인 양 국가 재정의 근간을 흔든다고 우려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그들은 바보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