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성시 고삼면의 고삼농협에는 색다른 문구가 있다. 하나는 ‘생명농업의 발상지 고삼’이고, 다른 하나는 ‘전국 최초로 농민과 의료인들의 의료협동조합 결성’이다.
먼저 생명농업은 1994년 고삼 청년들과 농협이 전국 최초로 친환경 농법을 도입하면서 시작됐다. 우루과이라운드(UR) 타결과 농산물시장 개방을 전후로 당시 고삼면 청년들은 좌절 대신 발상의 대전환을 통해 자발적으로 서울대에 농업·농촌의 장기 발전 계획을 의뢰했다. 정부의 ‘환경농업육성법’이 제정되기 3년 전이자 ‘친환경 농업 원년’ 선포 4년 전이었다. 시대의 선구자들이었다.
SK하이닉스 용인 반도체 공장
친환경생명농업의 대표 지역과
폐수 배출 문제로 격렬한 갈등
우회 방류로 농민들과 상생해야
의료협동조합은 1987년 고삼면 청년들과 연세대학교 기독학생회 의료인들의 주말공동 진료 활동으로부터 시작했다. 자율적 건강 협동 활동의 시작이었다. 이 씨앗은 1994년 한국 최초의 의료생활협동조합인 안성의료생활협동조합(현 안성의료복지 사회적 협동조합)으로 발전했다. 창립 이래 공동 참여, 공동 소유, 민주적 운영이 원칙이다. 창립 시 250명 조합원, 1억여원의 출자금, 2개 의료기관, 12명의 직원에 불과했던 이 사회적 협동조합은 현재 8000여 명의 조합원, 23억여원의 출자금, 5개 의료기관, 150여 명의 직원으로 성장했다.
자립적 고삼면 농민들은 농업경제·경영 역시 특이하다. 친환경 생명농업에 이어 고삼농협과 면민들은 2012년 안성마춤푸드센터를 설립, 100% 친환경 국내산 원료를 사용한 가공식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재료·위생·기술은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설립 당시 2억원대에 불과했던 푸드센터의 매출은 현재 200억원대를 달성했고, 양곡 유통센터 매출은 260억원에 달한다. 고삼농협의 금융자산은 3000억원을 돌파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최초’ 기록들과 앞선 성과를 나타내는 고삼면의 주민 숫자는 겨우 1700명이며, 조합원 숫자는 고작 1100명이다. 안성시 내 다른 면들보다 현저히 작을 뿐만 아니라 서울시 내 한 동(洞)당 평균 인구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친다. 그런 곳에서 자발적·자립적으로 이룩한 생명농업, 의료협동조합, 농산물가공산업, 농협의 성취였다. 전형적인 강소(强小) 자치, 강소 농촌, 강소 농협이다.
고삼면이 이토록 작아진 이유는 국가의 거대한 저수지 축조사업(1956~63) 때문이었다. 몽환적 풍광, 낚시, 영화 ‘섬’의 촬영지로 유명한 고삼저수지(고삼호수)를 말한다. 식량 자립이 절실했던 시기, 안성과 평택의 평야에 안정적인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고삼저수지가 건설됨으로써 수많은 고삼 주민들은 고향을 떠나야 했다. 국가 발전을 위한 불가피한 희생이었다.
UR의 파고도 혁신을 통해 넘고, 농촌·농업 침체도 극복하며 달려온 고삼농민과 안성시민들이 지금 위기와 격랑에 빠져 있다. 용인시 원삼면에 건설되고 있는 SK하이닉스 반도체 단지 때문이다. 현재 SK가 반도체 공정에 사용한 후 배출하는 물은 고삼저수지로 흘러들어가게 돼 있다. 하루 36만t에 달한다. 고삼과 안성의 농민과 농협, 시민단체들의 저항은 강력하다.
문제는 피해 지역과 수혜 지역, 안성시와 용인시의 심각한 갈등을 일단락지었던 2021년의 상생 협약이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상생 협약은 경기도지사, 안성시장, 용인시장, SK 측 사이에 맺어졌다. 한 언론(경기신문)의 정보공개 청구에 따른 보도를 보면, 협약 15개 사항 중 5년이 지난 현재 완료된 항목은 단 2건이다. 그러나 방류는 내년 2월로 임박해 있다. 게다가 상생 협약 당시 다뤄지지 않았던 LNG 열병합발전소 신설과 초고압 송전선로 문제까지 새롭게 추가됐다. 안성 조합장들과 고삼 농민들은 상생 협약의 파기를 주장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형평성과 책임성이다. 삼성전자는 용인시 이동과 남사에 들어설 반도체 산단에서 방류할 폐수를 농업용 저수지(이동저수지)로 직접 방류하지 않고 하천 하류로 우회해 처리한다. 그러나 SK는 고삼저수지로의 직방류를 고수하고 있다. 비용 때문이다. 삼성의 방안, 그리고 반도체 기업의 천문학적 이익을 고려할 때 SK의 변명은 구차하다. 자기들의 비용은 중요하나 농민들이 치를 대가는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상생이 최적이다. 즉 고삼저수지 직방류가 아닌, 삼성처럼 하천 하류로 우회 방류하는 것이다. 2021년 상생 협약 당시 경기도지사는 현 이재명 대통령이다. 이재명 정부는 실용을 내세우고 있다. 맞다. 상생은 실용의 다른 이름이다. 누구는 이익을 보고 누구는 위험에 처하면 실용이 아니다.
반도체 산업은 국가 발전에 중요하다. 그러나 국민과 지역 일부의 일방적 희생 위에 추진돼선 안 된다. 자치·생명·상생·번영이라는 가치와 운동, 성과와 결실을 올곧게 지켜오고 있는 대표적 지역인 고삼 주민들의 삶의 토대를 죽이면 안 된다. SK의 각성, 용인시의 결단, 이재명 정부와 경기도의 지혜가 절실하다. 아직 상생의 길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