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8월 15일 서울 국립극장에서 제29회 광복절 기념식이 진행되고 있다. 중앙일보DB
1974년 8월 15일 오전 11시 51분, 필립 하비브 주한 미국 대사는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에게 외교전문(telegram)을 긴급 타전했다.
제목: 한국 대통령 암살 미수
참조: 주도쿄 미국 대사관 긴급/태평양사령부 긴급
" 오전 10시25분경 서울 국립극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광복절 연설 도중 암살 시도가 있었고 실패했다. 대통령이 연설을 거의 마칠 무렵 한 남성이 일어나 대통령을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드레스에 피를 흘린 미시즈 박(※육영수 여사 의미)이 무대 밖으로 실려 나갔다. 한국 정부 장관은 그녀가 단지 기절한 것이라고 말했지만 우리는 그녀가 총에 맞았을 가능성을 체크하고 있다.(후략) "
1시간 뒤(낮 12시52분) 또다른 전문이 발송됐다.
" 청와대는 미시즈 박이 심각하게 부상 당해 머리 수술을 앞두고 있다고 나에게 알려왔다. 대통령은 미시즈 박이 있는 서울대병원에 있다. "
약 2시간 뒤(오후 2시54분)엔 ‘암살자’에 대한 정보가 타전됐다.
" 박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고 마담 박을 심각하게 부상 입힌 남성에 대한 여러 정보기관의 정보는 충돌한다. 대통령 경호실 사람은 그 남자가 요시 유키오라는 이름의 일본인이라고 했고, 믿을 만한 CIA 한국 지부 소스는 그가 한국어를 말하고 문세관(※실제 이름은 문세광)이라는 한국 이름을 갖고 있다고 했다. (중략) 우리는 팩트를 확인하기 위해 다른 소스를 찾고 있다. "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연설하는 동안 총격이 시작됐고 육영수 여사는 쓰러졌다. 중앙일보DB
이후 오후 7시32분에 보낸 전문의 정보 출처는 ‘국무총리’(※당시엔 김종필)로 명시됐다.
" 국무총리가 나에게 그 남자(※문세광)를 조사중이나 아직 말을 많이 하지 않고 있다고 알려왔다. (한국) 정부는 이 암살자가 어떤 공모에 가담한 게 아닌지 의심하고 있으나 아직 분명한 증거는 없다. "
이날 보낸 마지막 전문의 발송 시각은 오후 8시41분이었다. 단 한 문장이었다.
" 청와대가 마담 박이 총상으로 15일 저녁 서거했다고 나에게 알려왔다. "
1974년 8월 15일 주한 미국 대사관이 육영수 여사의 수술 경과 및 상태를 시시각각 미 국무부에 타전한 외교 전문 일부.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자료 캡처
이날 하루 주한 미국 대사가 미국 워싱턴에 숨가쁘게 타전한 외교전문만 9건(1건은 비공개)이었다. 당일 한국 상황이 얼마나 긴박했고 암살자 정체에 대해 어떤 혼선을 빚었는지 보여주는 역사적 기록이다.
이 사료는 기밀로 분류됐다가 최근 해제됐다. 국사편찬위원회가 2025년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1974년도 주한 미국대사관이 생산한 비밀문서 51개 문서철 1200여 건을 확인한 뒤 목록 정리 작업을 거쳐 2026년 8월 전자사료관에 공개했다.
‘이팩트: 이것이 팩트다’ 취재팀은 이중에서도 ‘암살 시도와 미시즈 박 암살’이라고 쓰여 있는 문서철을 분석했다. 여기엔 육 여사가 피격된 8월 15일부터 암살자 문세광이 사형된 다음날인 12월 21일까지 주한 미국 대사관이 미국에 보냈던 20건의 외교전문과 2건의 ‘문서 열람 철회 통지서(WITHDRAWAL NOTICE)’가 들어 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2025년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수집한 1974년도 주한 미국대사관 비밀문서 중 한 문서철. ‘암살 시도와 미시즈 박 암살’이라 쓰여 있다.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캡처
이팩트 취재팀은 공개된 외교전문 20건을 바탕으로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재구성했다. 영화 ‘암살자(들)’을 계기로 불거진 음모론이 과연 옳은지 판단하는데 도움이 될 사료라는 인식에서다.
당시 미국은 동아시아 반공 전선의 핵심 축인 한국과 일본 상황에 관심이 컸다. 자체 정보력이 강한 데다 한국 국무총리 등 정부 관계자가 핵심 정보를 주한 미 대사에게 직접 알리고 있었던 만큼 주한 미 대사관이 생성한 문서는 신빙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물론 이들 문서는 수사 기록은 아닌 만큼, 사건의 실체를 다 보여주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이들 문서엔 음모론자들이 육 여사 피격에 대해 제기하는 ‘박정희·중앙정보부 개입설’과 배치되는, 한국 정부 관계자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취재팀은 독자들이 직접 판단할 수 있도록 핵심 내용 일부를 가급적 그대로 전한다. 이어 미국 조지워싱턴대 산하 국가안보기록보관소(National Security Archive)가 별도로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등에서 발굴한 자료도 소개한다. 1974년 박정희 대통령이 주한 미국 대사 등을 만나 토로했다는 내용이다. 다음은 그 일부다(※문서 속 또다른 내용은 이 기사 후반부에서 전한다).
" 박 대통령은 ‘많은 사람들이 권력에서 물러나라고 했는데, 그런 조언을 받아들였다면 아내가 지금도 살아있을 것’이란 사실을 아내가 살해당한 뒤 100일 동안 깊이 생각했다고 말했다. "
1974년 8월 19일 박정희 대통령이 고(故) 육영수 여사 영구차 앞에서 애도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에 실린 사진이다.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계속)
박정희 “사임했더라면”…美대사 ‘육영수 암살’ 기밀 문서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466427
JP가 증언한 육영수 암살 전말
육영수 피격, 박정희 엉엉 울었다…JP가 떠올린 ‘불길 사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1406
‘이것이 팩트다:이팩트’ 또 다른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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