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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로 세상 읽기] 그래도, 돌아갈 얼굴은 있다

Los Angeles

2026.10.01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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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명 캘리포니아 프레스티지 대학교 총장

이상명 캘리포니아 프레스티지 대학교 총장

가장 성대한 ‘귀향’의 영화를 보고 나오며, 나는 문득 물었다. 우리에게는, 정말 돌아갈 곳이 있는가.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신작 ‘오디세이(The Odyssey)’는 트로이 전쟁을 끝낸 오디세우스가 십 년 동안 바다를 떠돌다 마침내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해안선이 보이는 순간, 객석 곳곳에서 옅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인간은 누구나 ‘돌아가고 싶은 곳’을 품고 살며, 이 갈망은 3000년째 형태만 바꾸어 되풀이되어 온 질문이다. 그리스인은 일찍이 이 갈망에 ‘노스토스(nostos)’라는 이름을 붙였다. ‘귀향’이라는 뜻이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에게 귀향은 지혜와 인내로 쟁취해야 하는 일이었다. 반면 히브리 백성에게 귀향은 전혀 다른 문법을 가졌다. 바빌론의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은 스스로의 힘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너희는 노역의 때가 끝났다”는 하나님의 선언과 함께 돌아왔다(사 40:2).  
 
이후 베르길리우스(Vergilius)의 서사시 속 트로이 유민 아이네이아스(Aeneas)는 옛 고향 대신 새 고향을 세워야 했고, 근대 낭만주의에 이르면 고향이란 지도 위의 장소라기보다 존재 깊은 곳의 결핍, 곧 향수가 되었다.
 
그러나 오늘의 귀향은 영웅의 모험이나 시인의 순례가 아니라, 사라진 동네와 흩어진 가족, 두 언어 사이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이다. 이민 1세에게 고향은 낯선 관광지가 되었고, 2세에게 고향은 애초에 없던 지명이다.  
 
골목은 재개발로 사라지고, 벗들은 세계로 흩어졌다. 현대인은 오디세우스보다 오래, 그 어떤 낭만주의자보다 막막하게 떠돈다. 돌아갈 좌표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누가복음 15장의 탕자가 이 모든 전통보다 정직한 답을 준다. 탕자는 지도가 아니라 얼굴 하나를 향해 걸어갔다. 그를 맞이한 것도 장소가 아니라, 멀리서부터 먼저 달려 나온 아버지의 두 팔이었다.  
 
오디세우스가 쟁취했고, 아이네이아스가 새로 세워야 했으며, 낭만주의자가 끝없이 그리워했던 고향을 탕자는 값없이 되돌려 받았다. 성서가 증언하는 고향은 좌표가 아니라 ‘관계’다.
 
그 관계에는 세 겹의 근거가 있다. 먼저 ‘언약’이다. 하나님은 “내가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렘 30:22)는 약속으로 관계를 먼저 여셨다.  
 
다음은 ‘성육신’이다. 예수는 탕자처럼 스스로 떠난 이가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떠난 자들을 찾아오신 분이다(요 1:14).  
 
마지막은 ‘종말론’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계 21:3)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때, 귀향은 비로소 완결된다.
 
그러니 다시 묻는다. 우리에게는, 정말 돌아갈 곳이 있는가. 없는 것은 지도일 뿐, 얼굴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도 없이도 걸어갈 수 있는 얼굴 하나, 그것이 우리가 끝내 돌아갈 진짜 고향이다. 아직 지도는 없다. 그러나 누군가 먼 데서 이미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이상명 / 캘리포니아 프레스티지 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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