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성대한 ‘귀향’의 영화를 보고 나오며, 나는 문득 물었다. 우리에게는, 정말 돌아갈 곳이 있는가.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신작 ‘오디세이(The Odyssey)’는 트로이 전쟁을 끝낸 오디세우스가 십 년 동안 바다를 떠돌다 마침내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해안선이 보이는 순간, 객석 곳곳에서 옅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인간은 누구나 ‘돌아가고 싶은 곳’을 품고 살며, 이 갈망은 3000년째 형태만 바꾸어 되풀이되어 온 질문이다. 그리스인은 일찍이 이 갈망에 ‘노스토스(nostos)’라는 이름을 붙였다. ‘귀향’이라는 뜻이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에게 귀향은 지혜와 인내로 쟁취해야 하는 일이었다. 반면 히브리 백성에게 귀향은 전혀 다른 문법을 가졌다. 바빌론의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은 스스로의 힘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너희는 노역의 때가 끝났다”는 하나님의 선언과 함께 돌아왔다(사 40:2).
이후 베르길리우스(Vergilius)의 서사시 속 트로이 유민 아이네이아스(Aeneas)는 옛 고향 대신 새 고향을 세워야 했고, 근대 낭만주의에 이르면 고향이란 지도 위의 장소라기보다 존재 깊은 곳의 결핍, 곧 향수가 되었다.
그러나 오늘의 귀향은 영웅의 모험이나 시인의 순례가 아니라, 사라진 동네와 흩어진 가족, 두 언어 사이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이다. 이민 1세에게 고향은 낯선 관광지가 되었고, 2세에게 고향은 애초에 없던 지명이다.
골목은 재개발로 사라지고, 벗들은 세계로 흩어졌다. 현대인은 오디세우스보다 오래, 그 어떤 낭만주의자보다 막막하게 떠돈다. 돌아갈 좌표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누가복음 15장의 탕자가 이 모든 전통보다 정직한 답을 준다. 탕자는 지도가 아니라 얼굴 하나를 향해 걸어갔다. 그를 맞이한 것도 장소가 아니라, 멀리서부터 먼저 달려 나온 아버지의 두 팔이었다.
오디세우스가 쟁취했고, 아이네이아스가 새로 세워야 했으며, 낭만주의자가 끝없이 그리워했던 고향을 탕자는 값없이 되돌려 받았다. 성서가 증언하는 고향은 좌표가 아니라 ‘관계’다.
그 관계에는 세 겹의 근거가 있다. 먼저 ‘언약’이다. 하나님은 “내가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렘 30:22)는 약속으로 관계를 먼저 여셨다.
다음은 ‘성육신’이다. 예수는 탕자처럼 스스로 떠난 이가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떠난 자들을 찾아오신 분이다(요 1:14).
마지막은 ‘종말론’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계 21:3)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때, 귀향은 비로소 완결된다.
그러니 다시 묻는다. 우리에게는, 정말 돌아갈 곳이 있는가. 없는 것은 지도일 뿐, 얼굴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도 없이도 걸어갈 수 있는 얼굴 하나, 그것이 우리가 끝내 돌아갈 진짜 고향이다. 아직 지도는 없다. 그러나 누군가 먼 데서 이미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