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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색 변기·현대미술 한곳에…철거 앞둔 ‘시한부 호텔’의 실험 [비크닉]

중앙일보

2026.10.02 22:00 2026.10.05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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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북로를 타고 서울의 서쪽으로 달리다 보면 용산에 다다르기 직전, 오른쪽에 아직 개발의 손이 더딘 주택 지대가 나타난다. 주택 재개발 정비사업이 한창인 한남5구역. 금싸라기 땅이라 불리지만, 정작 그 가치는 헌 집들이 헐리고 새 아파트가 올라선 뒤에야 곱해지는 곳이다. 이곳에 지난달 한 호텔이 정식으로 간판을 올렸다.
지난달 3일 일반에 공개한 서울 용산구 치커리 호텔 전경. 40여년 된 여관을 개조했다. 사진 어니언

지난달 3일 일반에 공개한 서울 용산구 치커리 호텔 전경. 40여년 된 여관을 개조했다. 사진 어니언

곧 허물어질 자리에 들어선 새 공간의 이름은 ‘치커리 호텔’. 1982년에 세워져 3대째 여관으로 운영되던 ‘잠수장’을 고쳐 만들었다. 객의 하룻밤을 지켜준다는 본질적 기능 외에도 긴 복도와 붉은 카펫, 손잡이도 그대로인 방문 등 잠수장의 많은 부분이 온전히 남아 있다.

치커리 호텔은 재생의 감각으로 공간을 다듬어온 카페 어니언의 첫 호텔 프로젝트다. 어니언은 지난 2016년 금속 공장을 개조한 성수점을 시작으로, 우체국 건물에 들어선 미아점, 한옥을 고친 안국점, 시장 안에 자리 잡은 광장시장점을 차례로 선보이며, 독특한 공간 경험으로 서울의 카페 문화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 2016년 문을 열어 성수동의 명물로 자리잡은 카페 어니언 전경. 금속 공장을 개조했다. 강정현 기자

지난 2016년 문을 열어 성수동의 명물로 자리잡은 카페 어니언 전경. 금속 공장을 개조했다. 강정현 기자

가장 최근인 지난달 18일에는 어니언 명동점이 문을 열었다. 한국식 보자기 포장과 전통 다방을 연상시키는 인테리어 등이 화제다. 치커리 호텔과 어니언 명동점 오픈으로 분주한 유주형 어니언 대표를 지난달 24일 치커리 호텔에서 만났다.

유효기간이 정해진 여관을 이어받다
" “누구는 짧게 2년, 길게는 5년 보더라고요.” "
사업시행 인가가 난 재개발 구역에 있는 40년 된 여관을 개조하는 프로젝트. 어쩌다 이런 무모한 일을 벌였을까. 유주형 대표는 ‘지역 소멸’이라는 뜻밖의 단어를 꺼내 들었다. 버려진 것들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늘 공간에 표현해 온 어니언의 궁극적 목표는 지방 도시 소멸을 해결하는 데 일조하는 것. 카페를 넘어 호텔이라는 콘텐트를 다음 목표로 생각하던 차였다.
3대째 이어온 잠수장 여관 과거 전경. 사진 구글맵 캡처

3대째 이어온 잠수장 여관 과거 전경. 사진 구글맵 캡처

코로나19가 한창이던 때 강변북로를 지나다 우연히 잠수장을 발견했고, 소개를 받아 3대째 여관을 운영해 온 주인을 만나 “이 여관을 이어받아 계속 숙박업으로 운영하고 싶다”고 설득했다. 그동안 오래된 공간을 동력 삼아 연속성 있게 오프라인 비즈니스를 해왔던 어니언의 행보가 설득에 도움이 됐다. 공사가 시작되기 전날까지 영업을 이어간 잠수장은 그렇게 문을 닫았다. 40년 넘게 지켜온 공간에 대한 애착이었을까. 주인은 마지막 날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금방 헐릴지도 모르는 건물을 이어받아 고치는 작업은 어땠을까. “특이한 얘기지만, 사라지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우선은 오래 쳐다봤습니다.”
치커리 호텔 내부 전경. 오래된 계단과 손잡이, 카펫 등이 그대로인 가운데 현대 미술 작가들의 작품이 곳곳에 포진해있다. 사진 어니언

치커리 호텔 내부 전경. 오래된 계단과 손잡이, 카펫 등이 그대로인 가운데 현대 미술 작가들의 작품이 곳곳에 포진해있다. 사진 어니언

어니언은 내부에 공간을 담당하는 어니언 스튜디오를 두고 있다. 김동규·김성조 듀오 디자이너 그룹 패브리커가 주축이다. 외주를 주지 않고 기획부터 시공까지 대부분 유주형 대표와 스튜디오 팀이 도맡았다. 처음엔 들고 나갈 수 있는 가구와 미술품에 투자하려고 했지만, 성에 차지 않아 결국 벽이나 바닥에도 공을 들였다.

낡은 것과 새것의 경계에서
1층은 카페 치커리, 2층은 바 티타산, 3층과 4층에는 8개의 객실, 루프톱 공간으로 구성된 호텔의 입구는 서도호 작가의 작품으로 시작된다. 차양을 드리운 듯 입구에서 안과 밖의 경계를 나눠 마치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것 같다. 내부 곳곳에도 류성실·양혜규·최하늘 등 작가들의 작품이 어우러진다. 1층 카페와 다이닝 공간의 천장 보에는 작가들의 친필 사인이 마치 낙서처럼 그려져 있다. 유주형 대표는 “떡볶이집에 흔히 보이는 ‘누구 다녀감’ 같은 감성인데, 함께 작업한 작가들의 이름이 쌓이면 그 자체가 역사이자 작품이 되지 않을까 했다”고 설명했다.
치커리 호텔 입구에서 만날 수 있는 서도호 작가의 작품. 사진 어니언

치커리 호텔 입구에서 만날 수 있는 서도호 작가의 작품. 사진 어니언

미술 작가들의 장난스러운 낙서처럼 치커리 호텔은 낡은 것과 새것, 분주함과 고요함, 예술과 일상의 경계에 서 있는 듯했다. 호텔의 뼈대는 잠수장 시절 그대로다. 겉에 붙인 스티로폼을 걷어내자 붉은 벽돌이 드러났다. 복도의 낡은 카펫은 깔끔하게 매만져 그대로 썼고, 방문도 손잡이도 옛 그대로다. 대신 편리해야 하는 객실 욕실은 전면 개조하되, 옥색 변기는 잠수장 시절과 똑같은 것으로 새로 구해 설치했다.
 오래된 건물이지만 욕실 등 기능이 필요한 곳은 전면 개조했다. 사진 어니언

오래된 건물이지만 욕실 등 기능이 필요한 곳은 전면 개조했다. 사진 어니언

객실 벽은 어니언의 고유한 작업 방식이 그대로 드러난 곳이다. 40여 년간 여관을 운영하다 보니 겹겹이 덧바른 벽지를 떼어내는 대신 갈아냈다. 저마다 다른 무늬로 드러난 벽은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하나의 작품이 됐다. 버려지는 것들도 다시 불러들였다. 1층 바닥은 공사장에서 쓰고 버려지는 거푸집으로 마감했고, 강변북로의 낡은 가림막을 수거해 입구 지붕에 올렸다.
세월의 흔적이 엿보이는 복도. 옥색 변기는 옛 모델과 같은 것을 구해 새로 달았다. 사진 어니언

세월의 흔적이 엿보이는 복도. 옥색 변기는 옛 모델과 같은 것을 구해 새로 달았다. 사진 어니언

한국적인 ‘근본 없음’
재생의 감각과 함께 한국적인 것은 늘 어니언의 주요 테마였다. 치커리 호텔에도 한국적 색채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객실의 문을 열면 처음 마주하는 것은 커다란 보자기다. 보자기를 풀면 잠자리용 요와 이불이 나온다. “서구식 포장은 규격화돼 있어서, 안에 든 게 무엇이든 크기를 제약해 버리잖아요. 보자기는 담긴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죠. 그게 한국적 정수라고 느꼈습니다.”
보자기를 풀면 요와 이불이 나온다. 여관의 덧댄 벽지를 갈아내 하나의 작품처럼 연출한 벽. 사진 어니언

보자기를 풀면 요와 이불이 나온다. 여관의 덧댄 벽지를 갈아내 하나의 작품처럼 연출한 벽. 사진 어니언

그렇다고 기와나 단청 같은 익숙한 기호에서 나오는 한국적 감성은 아니다. 한국의 요소를 담되, 현대적 재해석이 따른다. 김민재 작가와 협업한 스위트룸 침실에서는 한지 조명이나 비닐 문 등을 연상시키는 유리섬유 작업이 이어졌다. 이혜미 도예가가 작업한 객실에는 전통 구들에서 영감을 얻어 유약과 은을 얹어 구운 디딤돌, 탁자가 놓였다.

한국 작가와의 협업이 유독 많은 이유를 묻자 그는 “한국 호텔이니, 로컬리티(locality·지역성) 관점에서 한국을 가져다 쓰는 게 가장 설득력 있다고 봤다”고 했다. “K-팝과 K-컬처로 한국이 멋있다는 인식이 세계 주류 사회에 퍼지면서, 예전엔 부끄럽다고 여겼던 기질이 이제는 장기가 될 수 있다는 걸 느낀다”고 설명했다.

유주형 대표가 생각하는 한국적인 것은 무엇일까. 그는 ‘짬뽕’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모던(현대성)은 거의 다 서구에서 시작된 거잖아요. 우리나라는 그런 것들이 되게 혼용돼 있고, 부끄러움 없이 막 섞는 데 특화돼 있어요. 저는 K-팝의 본질도 짬뽕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되게 멋있어요.”

10년 전 어니언이 성수에서 처음 내건 ‘베이커리 카페’라는 개념도 그렇게 나왔다. “카페와 빵집을 섞는다는 개념이 이전에는 없었어요. 이제는 독특한 한국만의 카페 문화가 됐죠.” 그래서 어니언은 ‘근본 없다’는 말을 좋아한다. 유주형 대표는 “근본 없음에서 출발하는 것들이 뭔가를 만드는 데 창의적 실마리가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지난달 새롭게 문을 연 어니언 명동은 카페와 빵집을 섞은 'K-베이커리'를 표방한다. 사진 어니언

지난달 새롭게 문을 연 어니언 명동은 카페와 빵집을 섞은 'K-베이커리'를 표방한다. 사진 어니언


‘스탠더드’ 집착 벗어나야… 지역으로 갈 것
그동안 어니언이 해온 낡은 것을 재생하고, 한국적 요소를 더하는 것은 모두 지역성과 통한다. 시장에 카페를 내고, 재개발 지역의 낡은 여관을 개조해 호텔을 만드는 식이다. 허물고 다시 짓기보다 머무는 자리에 자연스레 스며들면서도 한편으로 낯선 날것의 감각을 꺼내 드는 실험적 시도들이다.

유주형 대표는 치커리 호텔의 실험을 지역으로 잇고자 한다. “치커리가 한남동에서 성공하고 조금 규모가 큰 지방 도시에서도 성공하면, 지자체나 다른 자본과 합쳐 인프라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꿈이 있다”고 했다. 또 “좋은 서점과 미술관, 온천이 있는 호텔, 그 옆에 어니언 카페, 점심을 책임질 백반집과 저녁을 책임질 바나 레스토랑이 있다면 ‘여기서 아이도 키울 수 있겠다’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이혜미 도예가와 협업한 객실. 전통 구들에서 영감받은 디딤돌, 탁자 등이 설치됐다. 사진 어니언

이혜미 도예가와 협업한 객실. 전통 구들에서 영감받은 디딤돌, 탁자 등이 설치됐다. 사진 어니언

그러면서 “다들 서울 스탠더드로 도시를 보니까 지역은 인프라가 부족하게만 느껴지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우리는 표준화하고 빠르게 따라가는 건 잘하지만, 각자 삶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건 약한 것 같다. 기준이 너무 하나여서 아쉽다”라고 덧붙였다.

끝이 정해진 동네에 홀연히 등장한 조금 이상한 모양의 호텔. 치커리 호텔은 그가 내놓은 다양성에 대한 하나의 답인 셈이다. “치커리 호텔도 (다른 호텔과) 다르지만, 설득력이 있잖아요. 지역 개발도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요.”

b.피셜
비크닉이 브랜드라는 최고의 상품을 만들어내는 무대 뒤편의 기획자들을 만납니다. 브랜드의 핵심 관계자가 전하는 ‘오피셜 스토리’에서 반짝이는 영감을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유지연([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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