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크루즈는 과연 '디거'(3일 개봉)를 통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을 수 있을까. 크루즈는 이 영화를 통해 80나이의 탐욕스러운 배불뚝이 석유재벌로 변신했다. 사진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영화는 누가 봐도 지나치게 과장된 침실 풍경으로 시작합니다. 한 사람이 자기엔 엄청나게 거대한 침대와 높은 층고의 방. 영화 스크린을 연상시키는 큰 창 너머로는 이상할 정도로 ‘지나치게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집니다. 그 침대에서 억만장자 노인 디거 록웰(톰 크루즈)이 눈을 뜹니다.
영화의 제목 ‘
디거(Digger)’는 글자 그대로 ‘채굴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죠. 주인공 디거록웰은 거대 석유 기업의 수장이며 미국 대통령도 들었다 놨다 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자입니다. 잠에서 깬 록웰은 그린란드 해안의 석유 개발 현장 해저에서 메탄가스가 올라오고 있다는 비상 보고를 짜증으로 맞이합니다. 그에게 이런 소식 따위는 28세(!)를 맞이한 사랑하는 고양이 매기의 건강 이상에 비하면 눈곱만큼도 관심 없는 이야기일 뿐이죠.
하지만 록웰이 보고를 묵살한 직후 현장에선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고, 저택으로 록웰을 찾아온 회사의 안전책임자 가네시 박사(리즈 아메드)는 10억 달러(약 1조3500억원) 규모의 채굴 시설과 현장 인력이 흔적도 없이 날아간 건 단지 시작일 뿐이라고 보고합니다. 그 폭발로 인해 그린란드 남쪽에서 수억 톤 크기의 빙하가 떨어져 나와 유럽 대륙에 충돌할 거라는 예측이죠. 빙산이 거대한 쓰나미를 유발해 노르웨이 남쪽 해안을 전멸시키고, 인류 역사상 초유의 대재난을 일으킬 것이 확실해집니다.
누가 봐도 과장된 록웰의 침실 장면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사진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문제가 문제인 만큼 미국 대통령(존 굿맨)과 각료들이 록웰의 저택으로 급히 날아오고 대책 회의가 시작되지만, 마땅한 수단이 없습니다. 핵미사일로 목표를 날려버리자는 군부의 의견은 “빙산이 쪼개지면 더 큰 재해가 발생한다”는 가네시 박사의 말에 가볍게 밀려납니다. 결국 ‘디거’ 록웰은 혼자 힘으로 문제 해결에 나섭니다.
파란색 정장에 빨간 넥타이를 즐겨 매는 거구의 백인 대통령, 특히 기후 위기에 대한 경고에 콧방귀를 뀌는 대통령을 보는 순간 사람들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1차적인 메시지를 선명하게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순히 ‘우리가 지구를 망치고 있다’는 내용의 블랙 코미디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진짜 주제를 말하자면, 이 영화는 ‘우리가 현실을 이해하고 구성하는 방법’에 대한 영화라고 봐야 할 듯합니다.
감독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는 2014년작 영화 ‘버드맨’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왕년의 액션 스타 리건(마이클 키튼)을 통해 배우와 관객, 자본, 제작자들의 관계가 얽히고설킨 현대 할리우드의 이면을 통렬하게 비판했습니다. ‘버드맨’은 아카데미 작품상을 비롯한 4개 부문을 수상했죠.
‘버드맨’과 ‘디거’는 은근히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버드맨’을 본 많은 관객은 주인공 리건이 분장실 거울에 붙여 놓은 격언, "남들이 어떻게 보고 뭐라고 말하건, 모든 사물은 자신만의 본질을 갖고 있다(A thing is a thing, not what is said of that thing)"라는 말을 기억합니다. 하지만 영화 ‘버드맨’은 리건의 이런 믿음이 철저하게 배신당하는 과정을 그려냅니다. 리건은 자신이 생각하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추구하려 애쓰지만, 주위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보는 리건의 모습을 그에게 강요합니다.
‘디거’에서도 이와 비슷한 대사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기억나는 록웰의 대사 중에 “
말들이 곧 인식이고, 인식이 곧 실체야(Words are perception. And perception is reality)”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객관적 사실이라는 것은 없고, 사람들은 자신들 각자의 입장에서 인식한 것이 현실이라고 믿는다는 것이죠. 이 말은 ‘존재한다는 것은 곧 인식되는 것’이라는 영국 철학자 조지 버클리의 말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록웰은 이 대사로 자신이 지금까지 ‘말들’을 통해 세상의 여론을 어떻게 마음대로 주물러 왔는지를 설명합니다.
톰 크루즈는 지난해 11월 아카데미 공로상을 수상했지만 아직 연기상은 받은 적이 없다. 사진 AFP 연합뉴스.
‘디거’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올해 64세인 톰 크루즈의 열연입니다. 최근 수년간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와 ‘탑건: 매버릭’ 등에서 나이를 잊은 액션으로 노익장을 과시하던 크루즈는 이 작품에서 배 나오고 추악한 노인 역을 맡아 45년 연기 인생의 일대 전기를 공개합니다. 특히 유럽 각국 대표 앞에서 ‘대체 에너지는 허상이고, 내가 없으면 당신들이 누리는 문명도 없다’며 일장 독설을 퍼붓는 모습은 대단한 장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벌써부터 크루즈가 내년 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생애 첫 남우주연상을 수상할 수 있을지 가능성을 점치고 있습니다. 크루즈는 지금까지 남우조연상 1회, 남우주연상 2회 후보로 지명된 적이 있지만, 2026년 공로상 외에는 아직 오스카 경쟁 트로피를 받지 못했습니다. (만약 이번에 수상에 성공한다면 이냐리투는 2016년 ‘레버넌트’를 통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 남우주연상을 안긴 데 이어 할리우드 최고의 주연상 제조기로 떠오를 전망입니다.)
크루즈의 연기가 대체로 긍정적인 화제를 뿌리는 반면, 영화 전체에 대한 평가는 벌써부터 찬반 논란이 한창입니다. 일각에서는 현실과 연극 무대를 오가는 이냐리투의 환상적이고 야심 찬 연출에 찬사를 보내는 반면, 다른 쪽에선 쓸데없는 장광설과 뻔한 풍자가 지루하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 '디거' 홍보를 위해 내한한 톰 크루즈가 2일 서울 영등포구 타임스퀘어에서 한국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개인적으로 저는 전자의 입장을 지지합니다.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이 영화에는 크게 두 번의 반전이 있습니다. 이냐리투 감독은 ‘영화 속 연극’이라는 형식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 이 세계를 보고 듣고 이해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누군가에 의해 해석된 세계를 그저 받아들일 뿐’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설득력 있게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우리에게 세계를 해석해 주는 힘을 가진 것은 결국 자본의 힘이며, 그것은 극장 안에서 영화 ‘디거’를 보고 있는 관객에게도 실시간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임까지도 보여주죠.
그런 면에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향한 톰 크루즈의 욕심이 낳은 괴작’이라는 일부의 평가는 좀 지나친 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냐리투의 새로운 화법과 야심 찬 프로덕션 디자인, 촬영은 진정 경탄할 만한 영상을 만들어 냈고, 이런 시도가 크루즈의 열연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고나 할까요. 모든 등장인물이 지나치게 말이 많다는 건 분명 단점이지만, 상영 시간이 그리 길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특히 스탠리 큐브릭의 고전 ‘닥터 스트레인지러브(1964)’나 배리 레빈슨의 세련된 풍자극 ‘왝 더 독(1997)’ 같은 영화들을 좋아하셨던 분들께 강력하게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