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한국축구 A대표팀은 월드컵 본선을 한 번도 못 밟아 본 베네수엘라와 평가전에서 0-0으로 비겼다. 북중미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전 악몽을 떠올리게 할 만큼 졸전이었다.
더 큰 파장을 부른 건 핵심 수비수 김민재(30·바이에른 뮌헨)가 교체 직후 벤치에서 축구화를 집어던진 장면이었다. 경기 후에는 “수비수들이 불쌍하고, 다같이 싸우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다 같이 머리를 처박고 뛰어야 한다”고 작심발언을 쏟아냈다.
실점 위기 상황에서 한국 선수 9명이 밀집했는데도 육탄방어에 나선 건 김민재 한명 뿐이었고 나머지는 강건너 불구경하는듯 했다. 아스널이나 파리생제르맹 같은 세계 최강팀들도 높은 에너지 레벨로 미친듯이 수비하는데, 한국축구는 투쟁심마저 실종 된 모습이었다.
베네수엘라전에서 수비하는 김민재(가운데). 뉴스1
팬들 사이에서는 빅클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면서도 태극마크를 달면 거친 말로 ‘대가리 박고’ 뛴 박지성의 이름이 소환되고 있다. 전임 홍명보 감독이 선수단 미팅 때 화면에 ‘FIGHT’ 단어를 띄우고 경합 강도를 높이라는 일화까지 회자되는 실정이다.
핵심 미드필더 황인범(30·포르투)는 대한축구협회장 공백과 임시 감독 체제를 언급하며 “대표팀 9년차인데 여러 부분에서 변화가 잘 이뤄지지 않았다”며 울먹였다. 김민재와 황인범의 발언은 공격수들의 압박과 수비 가담 부족은 물론 내부 문제를 겨냥한 것으로 읽힌다.
2일 울산 문수축구경기장에서 열린 대한민국과 베네수엘라의 축구 국가대표팀 평가전. 한국 손흥민이 교체된 후 모레노 감독과 악수하며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술적 패착에 대한 비판은 임시 지휘봉을 잡고 있는 로베르트 모레노(스페인) 감독을 향한다. 그가 부임 후 3경기 연속 고수한 4-4-2 포메이션은 중앙 미드필더 2명의 엄청난 활동량과 커버 범위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우루과이는 물론 베네수엘라와의 중원싸움에도 밀리면서, 한국 선수 역량을 고려해 3명의 미드필더 배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모레노 감독은 프리롤 형태의 섀도 스트라이커 자리에서 파괴력이 극대화되는 이강인을 오른쪽 측면에 배치해 영향력을 반감 시켰고, 합이 잘 맞지 않은 손흥민(LAFC)과 오현규(베식타시) 투톱 조합을 고집스럽게 밀어 붙였다. 모레노 감독은 건물 짓는 것에 비유하면서 “싹 갈아 엎는 게 아니라 한층한층 쌓아 올리는 중”이라고 항변했다.
3일 일본 아이치현 도요타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남자 축구 대한민국과 일본의 결승. 승리 후 금메달을 획득한 한국 선수들이 기념촬영을 하던 중 대회 득점왕과 도움왕을 차지한 엄지성이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러한 한국축구 현실은 세대교체 당위성으로 이어진다. 1992년생 주장 손흥민과 이재성(마인츠)은 차기 2030년 월드컵 시점에는 38세에 이른다.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에서 이름이 같은 박지성처럼 머리 박고 뛰며 4골4도움을 올린 엄지성(24) 등 젊은피 수혈은 이제 대안이 아닌 필수가 됐다. 모레노 감독 역시 SNS에 아시안게임 결승전을 시청 사진을 올리며 변화 가능성을 열어뒀다.
부임 후 1승1무1패를 기록 중인 모레노 감독에게 정식 사령탑 승격을 가늠할 기회는 이제 3경기밖에 남지 않았다. 내년 1월 아시안컵이 임박한 시점이라 유임에 무게가 실리는 분위기지만, 이름값에만 의존한 선발과 경직된 전술만 고집한다면 한국 대표팀과 동행은 단 6경기 만에 막을 내릴 수도 있다. 모레노호 다음 경기는 6일 용인에서 열릴 우즈베키스탄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