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해상 정몽윤 회장(왼쪽)과 최경주가 3일 경기도 여주시 페럼클럽의 클럽하우스를 배경으로 활짝 웃고 있다. 정 회장이 후원자로 나서고, 최경주가 호스트를 맡는 KPGA 투어 현대해상 최경주 인비테이셔널은 올해로 11회째를 맞았다. 김경록 기자
한국 남자골프의 ‘든든한 버팀목’ 현대해상 정몽윤(71) 회장과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통산 8승의 ‘코리안 탱크’ 최경주(56)를 지난 3일 경기도 여주시 페럼클럽에서 만났다. 그간 공식 인터뷰는 한 차례 정도였다고 기억을 더듬던 정 회장은 “한국프로골프(KPGA) 투어 현대해상 최경주 인비테이셔널이 올해로 11회째를 맞았다. 지난 10년간 단 한 번도 홍보를 위한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없었는데 ‘후원사 수장으로서 인터뷰 하나는 남겨야 하지 않겠느냐’는 주변의 조언을 더는 외면하기가 어려웠다”고 멋쩍게 웃었다. 그러자 최경주는 “시상식에도 모습을 비추시지 않는 회장님께서 인터뷰를 하신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이런 자리에는 절대로 나서지 않는 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의미로 귀한 시간이 됐다”고 함께 미소를 지었다.
재벌가 회장과 골프계 전설의 만남은 201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최경주의 이름을 건 대회가 새 스폰서를 찾지 못해 방황하던 시기. 정 회장은 “현대그룹이 운영하던 현대 유니콘스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후신인 넥센 히어로즈 후원도 끝나가는 시점이었다. 회사 차원에서 야구 외의 다른 종목 스폰서십을 알아보던 중 최경주 인비테이셔널이 없어질 위기라는 이야기를 듣고 연락을 취했다”고 했다.
그때 일화를 떠올리던 최경주의 얼굴이 밝아진다. 최경주는 “회장님의 사돈이신 고(故) 김인규 전 KBS 사장님으로부터 ‘좋은 소식이 있으니 당장 이 번호로 전화를 하라’는 연락이 왔다. 속으로 여러 상상을 했는데 대회를 후원해주시겠다는 말씀을 하시더라. 당장에라도 하늘로 날아갈 것만 같았다”고 웃었다.
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7남인 정몽윤 회장은 원래는 재계의 ‘소문난 야구광’이다. 중앙고 재학 시절부터 동대문운동장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모교를 응원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정 회장은 “우리 때 중앙고 야구부가 아주 강했다. 경기를 보는 재미가 있었다. 야구는 집으로 돌아오는 게임이다. 그 과정을 바라보는 묘미가 있다”고 했다. 그 사랑은 계속 이어져 1997년부터 2000년까지 대한야구협회 회장을 지냈다. 이때 한국 야구는 1998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과 2000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로 꽃을 피웠다.
현대해상 정몽윤 회장(왼쪽)과 최경주가 대담을 나누고 있다. 둘의 시선은 결국 한국 남자골프의 발전으로 향했다. 김경록 기자
골프와 연을 맺은 때는 1980년대 미국 유학 시절이라고 한다. 정 회장은 “학교 주변 퍼블릭 골프장이 워낙 많았다. 한국 유학생들과 중고 골프채를 사서 처음 필드를 밟아봤다”고 했다. 이어 “나처럼 스포츠를 사랑하신 아버님과도 자주 라운드를 나갔다. 뉴코리아나 금강이 단골 골프장이었다. 아버지께서 ‘(정)몽윤이는 성격이 침착해서인지 헤드업을 안 한다’고 칭찬하실 때면 기분이 참 좋았다”고 했다.
그렇게 골프 애호가가 된 정 회장. 최경주와는 간간이 필드를 밟는다고 했다. 정 회장은 “사실 업무용 골프를 하다 보면 스코어는 신경 쓰지 않게 된다. 그래도 아주 오래 전 뉴코리아에서 76타를 쳤다. 라이프 베스트다. 벙커에서 쳐도 들어가고, 러프에서 쳐도 들어가는 하루였다”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최경주는 “임팩트가 좋다. 또, 평소 스키를 타셔서인지 하체를 활용한 스윙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완도에서 스키를 못 배워서 아쉬울 따름이다”고 칭찬의 한마디를 더했다.
1995년 2월 26일자 중앙일보 기사. 당시 현대해상 정몽윤 대표이사의 야구 사랑 일화를 담았다. 중앙포토
정 회장이 새로 후원자로 나선 현대해상 최경주 인비테이셔널은 2016년부터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런데 이 대회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특별함이 있다. 바로 ‘선수 퍼스트’ 운영이다. 연습 시간을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 프로암을 진행하지 않고, 선수들에게 숙식을 무료로 제공한다. 또, 총상금 이외의 예비비(4500만원)를 마련해 컷을 통과한 61위 이하 선수들에게 균등 배분한다.
최경주는 “미국의 메이저대회를 제외하고 프로암을 하루도 하지 않는 대회는 아마 없을 것이다. 현대해상에서 제공하는 곤지암 연수원 숙소도 정말 일품이다. 대회장에서 후배들을 만나면 ‘아니 선배님, 이렇게나 선물이 많습니까’라고 되물을 정도”라고 웃었다. 정 회장은 “VIP를 위한 행사인 프로암을 하지 않으니까 주변에서 아쉬운 소리를 한다. 그래도 다른 이유는 없다. 가뜩이나 어려운 골프장(페럼클럽)에서 선수들이 마음껏 연습이라도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싶었다”고 했다. 인터뷰 중간에도 정 회장의 눈은 이따금, 선수들이 경기를 끝내는 18번 홀 그린으로 향했다.
현대해상 정몽윤 회장(왼쪽)과 최경주. 김경록 기자
정 회장과 최경주는 골프장까지 더한 삼박자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이 대회는 2020년부터 코스 난도가 높은 페럼클럽으로 대회장을 옮겼다. 페어웨이가 좁고, 러프가 질겨 선수들의 스코어는 잘 나오지 않지만, 관리 상태만큼은 최상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정 회장은 “최경주 프로의 의견을 많이 듣는다. 그래도 하나 내세울 것이 있다면 선수들이 티잉 그라운드에서 페어웨이로 들어가는 길목의 러프를 짧게 깎아놓았다는 점이다. 어떻게 보면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점인데 선수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매년 그렇게 관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경주는 “방송화면상으로도 그 지점의 러프가 길면 좋아 보이지가 않는다. 그런 세심한 배려가 돋보이는 대회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현대해상 정몽윤 회장(왼쪽)이 4일 KPGA 투어 현대해상 최경주 인티베이셔널 4라운드 경기를 바라보고 있다. 시상식에도 모습을 비추지 않는 정 회장은 코스 주변에서 선수들의 플레이를 지켜보곤 한다. 오른쪽은 정 회장의 아내인 한국브리지협회 김혜영 회장. 고봉준 기자
현재 한국 남자골프는 위기다. 대회는 갈수록 줄어들고, 대기업 후원도 계속 끊기는 중이다. 올 시즌이 끝나면 주축 선수들이 일본으로 넘어갈 준비를 할 만큼 총체적 난국이다.
PGA 투어 통산 500번째 대회를 앞둔 최경주는 “결국 경쟁력이 중요하다. 우리 선수들이 해외에서 치열하게 싸우려면 골프장마다 유망주 선수 1명씩을 키운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전국 500여개 골프장이 그렇게만 도와준다면 골프 저변이 달라질 것이다. 기업들의 후원도 당연히 절실하다”고 했다.
사실 대기업의 홍보를 위해선 여자골프 후원이 더욱 즉각적인 효과를 낸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는 매년 30개 넘는 대회를 치르는 반면, KPGA 투어는 20개 대회를 채우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10년 넘게 후원을 이어가는 정 회장은 “쉽지 않은 문제다. 내가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많지 않겠지만, 그래도 한국 남자골프를 위한다는 마음으로 이 대회를 끝까지 열겠다”고 화답했다. 곁에서 이를 듣던 최경주가 마지막 한마디로 인터뷰를 갈무리한다. “저도 계속 나오려면 팔굽혀펴기를 더 해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