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올해 98세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17세에 해방을 맞았다. 그리고 1947년 19세 되던 해 서울중앙방송국(KBS) 아나운서 공채 1기 시험에 합격해 방송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후 정부수립 전후의 각종 행사를 보도했고, 6·25 전쟁 중엔 일본 도쿄에 있던 유엔군총사령부방송(VUNC)에 1년간 파견되기도 했다. 그리고 22년간 방송일을 하다 1972년 미국 이민 길에 올랐다.
미국에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방송에 출연했기 때문에 여전히 내 목소리를 기억하는 사람이 더러 있을법하다. 조금 불편하기는 하지만 아직 보고, 듣고, 읽고, 쓰고 하는 일에 지장 없이 살고 있다. 특히 클래식 음악은 오래전부터 좋아해서 요즘도 하루에 두어 시간 정도씩 듣는다.
최근 미주중앙일보 지면을 통해 첼리스트 이방은씨와 피아니스트 임자향씨의 첼로 소나타 연주회 소식을 접했다.너무나 반가워 ‘나도 한마디’ 하는 생각으로 이 글을 쓰게 됐다.
이방은 첼리스트와의 인연은 77년 전인, 1949년 봄 시작됐다. 당시 서울 명동의 시공관에서는 프랑스 작곡가 라벨의 관현악곡 ‘볼레로’의 한국 초연 연주회가 있었고, 나는 그 연주회를 중계방송하는 담당 아나운서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딴 따다다 딴 따다다 딴딴 따다다 따다다 따다다...” 로 이어지는 단조로운 단위의 리듬인 ‘볼레로’가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던 때여서 클래식 음악 팬들에게도 낯선 음악이었다. 그런데도 이날 시공관 객석은 만원이었다. 아무래도 관객 대부분이 프로그램 1부에 있던 이인형씨의 피아노 협주곡을 들으러 온 것이 분명했다.
이인형씨는 당시 한국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였으며 한국 클래식 음악계를 주름잡던 테너 이인범씨의 친동생이기도 했다. 내 기억으로도 그는 멋있는 남자였다. 특히 그날의 연주곡 그리그의 A단조는 한국의 클래식 애호가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한 음악이었다.
당시 한국은 독일과 이탈리아를 제2차 세계대전의 적성국가로 간주한 까닭에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멘델스존의 협주곡이 연주되는 일이 드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인형씨의 연주가 끝나자 많은 관객이 일제히 기립박수를 보내며 환호성을 질렀다. 이때 무대 한쪽에서 단발머리 소녀가 꽃다발을 들고 뛰어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인형씨의 딸로 보였던 소녀는 꽃다발과 함께 아버석의 품에 안겼다. 순간 장내에 또다시 터질듯한 환호성이 울렸다. 이어 KBS 교향악단의 ‘볼레로’ 초연이 무난히 끝났지만 예상대로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그리고 그다음 해 비극적인 6·25 전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내가 미국에 이민 온 지 약 20년이 되던 무렵 평양에서 열린 민족통일 음악회를 계기로 이인형씨 부녀의 소식을 알게 됐다. 이인형씨는 전쟁 중 월북했다 세상을 떠났고, 단발머리 소녀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첼리스트가 되어 LA에 거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이방은씨의 연주회가 있을 때마다 달려가곤 했다. 1949년 시공관에서 극적으로 만나던 때의 얘기로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고, 때로는 편지로 이민생활의 애환을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몇해 동안 연주회 소식이 없다가 이번에 연주회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다. 특이 이번 연주회는 어린 시절부터 친구이자 서울예고와 서울대 음대 동창이기도 한 피아니스트 임자향 씨와의 협연이라 더 의미가 크다.
두 음악가는 이제 나이가 80대에 접어든 연주자다. 원숙하고 깊이 있는 연주로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내 기억으로는 아름다운 첼로 소나타가 한 프로그램에 실린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번 연주회의 연주곡 중,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 제5번 작품 102의 2는 그의 첼로 소나타 중에서도 가장 종교적인 깊이가 있는 곡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그의 첼로 소나타 작품 36은 그리그가 동생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음을 담은 엘레지라고 할 수 있다. 끝으로 프로코피에프의 첼로 소나타 119의 전체적인 인상은 ‘청춘의 서정’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따뜻하고 명쾌한 음악이다.
나는 77년 전의 단발머리 꽃다발 소녀를 생각하며 10월 24일(토)의 연주회가 무척 기다려진다.
연주회는 이날 오후 4시부터 LA나성제일교회(213 S. Hobart Blvd. LA)에서 열린다. 문의 전화는 (818) 212 - 85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