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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이 각본을 쓰자 역사가 뒤틀렸다

Los Angeles

2026.10.07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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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자(들) 논란
음모론과 픽션, 증거보다 상상 의존한 유사 문법
이념 덧씌울 때 ‘예술의 자유는 내 편에만’ 아집
왜곡 벗어나 희생자와 죽음 앞에선 겸허해져야
‘JFK’에서 짐 개리슨 검사 역의 케빈 코스트너. [Warner Brothers]

‘JFK’에서 짐 개리슨 검사 역의 케빈 코스트너. [Warner Brothers]

허진호 감독의 ‘암살자(들)’이 한국에서 거센 역풍에 휘말렸다. 1974년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던 문세광의 저격 사건에서 육영수 여사가 피격당한 데 대해 음모론적 의혹을 제기한 데서 비롯했다. 보수층은 역사 왜곡이라고 비난했고, 반대편은 표현의 자유로 맞섰다.
 
할리우드에서도 비슷한 논란이 숱하게 있었다. 1960년대 케네디 형제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잇따라 암살되고, 1970년대 초 워터게이트가 터지면서 음모론이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았다.
 
‘맨추리안 캔디데이트’ 중 주인공인 미군 병사의 세뇌 장면. [United Artists]

‘맨추리안 캔디데이트’ 중 주인공인 미군 병사의 세뇌 장면. [United Artists]

먼저 존 프랑켄하이머 감독의 작품 ‘맨추리안 캔디데이트(The Manchurian Candidate, 1962)’는 한국전쟁 중 포로로 잡혀 세뇌당한 미군 병사가 귀국 후 대선 후보 암살에 동원되는 이야기다. 이듬해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면서 뒤늦게 예언처럼 읽혔다. 도널드 트럼프가 버락 오바마나 조 바이든을 비난할 때 ‘맨추리안 캔디데이트’라는 표현을 종종 썼는데, 남의 나라를 위해 자국을 배신하는 정치인이라는 의미다. 반트럼프 진영은 트럼프를 그렇게 불렀다.
 
앨런 J. 퍼쿨라 감독의 ‘패럴랙스 뷰(The Parallax View, 1974)’에선 상원의원 암살의 배후를 쫓던 기자가 또 다른 암살의 범인으로 몰려 사살되고, 조사위원회는 단독 범행이라고 발표한다. 케네디 암살을 단독 범행으로 결론 내린 워런 위원회(Warren Commission)를 노골적으로 겨냥한 결말이다.
 
‘콘돌’에서 자기 조직에 쫓기는 CIA 요원 역의 로버트 레드퍼드. [Paramount]

‘콘돌’에서 자기 조직에 쫓기는 CIA 요원 역의 로버트 레드퍼드. [Paramount]

시드니 폴락 감독의 ‘콘돌(Three Days of the Condor, 1975)’에서 적은 정부 안에 있다. 로버트 레드퍼드가 연기한 CIA 분석요원은 동료들이 몰살당한 뒤 자기 조직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은 모든 사실을 뉴욕타임스에 넘겼다고 말하지만, CIA 간부는 신문이 그걸 실어줄까 하며 되묻는다.  
 
음모론 영화가 현실 정치를 움직인 사례는 올리버 스톤 감독의 ‘JFK(1991)’다. 뉴올리언스 지방검사 짐 개리슨이 케네디 암살의 배후를 추적하는 이 영화는 CIA와 군, 정부 고위층이 얽힌 거대한 음모를 그렸다. 역사 왜곡이라는 집중포화를 맞았지만, 비공개 기록이 남아 있음을 알리는 마지막 자막이 여론을 움직였다. 이듬해 의회는 케네디 암살 기록 공개법을 통과시켰다.
 
앨런 파커 감독의 ‘미시시피 버닝(Mississippi Burning, 1988)’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1964년 민권운동가 세 명이 KKK에게 살해된 실화를 다루면서, 민권운동을 감시하던 FBI를 영웅으로 그려 역사 왜곡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본 지역신문 기자 제리 미첼은 범인 대부분이 처벌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의 재취재 끝에 2005년 사건 주모자는 41년 만에 유죄 판결을 받았다.
 
반대로 마이클 무어 감독의 ‘화씨 9/11(Fahrenheit 9/11, 2004)’은 부시 재선을 막겠다는 목표를 숨기지 않았지만, 같은 생각을 가진 관객을 결집했을 뿐 부시의 재선을 막지 못했다. 영화가 정치운동의 수단이 됐다.
 
음모론과 픽션은 같은 문법을 공유한다. 현실에는 우연과 예측불허의 일들이 넘쳐나지만 영화엔 그런 게 없다. 화면에 등장한 총은 반드시 발사되고, 흩어진 단서는 결말에서 하나로 꿰어진다. 모든 사건 뒤에 설계자가 있다고 믿는 음모론은 세상을 한 편의 각본처럼 읽는다. 때로는 그 각본이 현실과 맞아떨어지기도 한다. ‘맨추리안 캔디데이트’의 세뇌는 개봉 당시 공상에 가까웠지만, 1970년대 CIA의 마인드컨트롤 실험이 드러나면서 더는 공상으로만 볼 수 없게 됐다.
 
픽션이 현실의 정치 언어가 되기도 한다. 배리 레빈슨 감독의 ‘왝 더 독(Wag the Dog, 1997)’에서 백악관 참모들은 대통령의 성추문을 덮으려고 할리우드 제작자와 손잡고 가짜 전쟁을 연출한다. 개봉 한 달 뒤 클린턴과 르윈스키의 스캔들이 터졌고, 그해 클린턴이 해외 공습을 명령하자 언론은 일제히 이 영화 제목을 꺼냈다. 꼬리가 몸통을 흔든다는 뜻의 관용구 ‘왝 더 독’은 궁지에 몰린 권력이 밖에서 사건을 꾸며 시선을 돌리는 수법을 부르는 정치용어가 됐다.
 
문제는 이 장르의 문법 자체에 있다. 음모론 영화는 공식 발표를 거짓으로 몰고, 홀로 의심하는 개인을 진실의 수호자 자리에 올려놓는다. ‘JFK’는 실제 기록 필름과 재연 장면을 뒤섞어 관객이 사실과 허구를 가려내기 어렵게 만들었다.  
 
기록이 침묵하는 자리를 상상으로 채우는 것까지는 픽션의 권리다. 그러나 이미 확인된 사실을 뒤집는 것은 왜곡이다. 논쟁은 늘 그사이, 즉 공식 결론에 의문이 남은 회색 지대에서 벌어진다. ‘암살자(들)’은 회색지대에 서 있다고 자임하지만 보수층은 회색지대로의 도피로 본다.
 
의심하는 쪽도 바뀌어 왔다. 1970년대 음모론 영화는 CIA와 군, 군수업체를 의심하는 진보 정서에서 나왔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숨은 권력을 의심하는 ‘딥스테이트’ 담론은 보수 쪽에서 나온다. ‘JFK’가 다시 불붙인 케네디 암살 기록 공개 요구는 30여 년 뒤 트럼프 대통령이 정보기관을 겨냥해 이어받았다. 상대 진영이 연루된 의혹은 합리적 의심이 되고, 우리 편이 연루되면 황당한 음모론이 된다.
 
미국의 정치 영화가 대체로 ‘숨겨진 진실이 있다’고 의심한다면, 한국의 정치 영화는 ‘역사를 다시 보자’고 말해왔다. 다시 볼 때엔 꼭 색안경을 끼곤 한다. 음모론에 진영 논리가 덧붙으면서 논란은 더 커진다. 이승만·박정희 정권을 비판한 다큐멘터리 ‘백년전쟁(2012)’은 우파의 반발 속에 방송 제재를 받았고, 이승만을 재평가한 ‘건국전쟁(2024)’은 좌파에게 독재 미화라는 비판을 들었다.
 
양쪽 모두 자기 편 영화에는 표현의 자유와 예술적 상상력을 말하고, 반대편 영화에는 역사 왜곡을 들이댄다. 이념적이고 종족주의적인 표현의 자유는 원칙이 아니라 진영의 도구다.
 
‘암살자(들)’은 경호원 유탄설에서 정권 개입설까지 확인되지 않은 가설을 다룬다. 그러면서 기자들의 진상 추적이라는 틀을 빌려 영화 전체를 저널리즘 으로 포장했다. 2005년 ‘그때 그사람들’도 같은 문제로 법정에 섰다. 법원은 상영을 막지 않되, 허구를 실제로 믿게 할 수 있는 다큐멘터리 장면은 잘라내게 했다. 진영적 의도를 상상력으로 분장시킨 영화라 해도 상영 중단이나 고발을 통해 마치 무슨 살충제 뿌리듯 박멸시키긴 어렵다. 불편한 영화일수록 비평과 관객의 판단에 맡기는 게 성숙한 대응일 수 있다. 물론 이 역시 관객 수준에 달린 문제이긴 하다.
 
마지막으로 폭력에 목숨을 잃은 희생자를 애도하는 마음에는 진영이 있을 수 없다. 유가족에게 이 논란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는 점도 헤아려야 한다.

김정 영화 평론가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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