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8일 청와대에서 국빈 방한한 압델 파타 알시시 이집트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다. 전민규 기자
이재명 대통령이 그간 정부가 검토해 오던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에 대해 연내 가입을 신청하지 않도록 하라고 관련 부처에 지시했다.
강유정 청와대 수석대변인은 이날 오후 서면 브리핑을 통해 “이 대통령은 시한을 정해놓기보다 진정성을 갖고 농어민들의 목소리를 충분히 듣고 지속적으로 대화해 줄 것을 당부했다”며 이같이 전했다. 강 수석대변인은 또 “국제통상 질서가 빠르게 변하는 상황에서 CPTPP는 글로벌 통상국가를 지향하는 대한민국이 중요하게 검토해야 할 선택지”라며 “하지만 통상정책은 국민의 삶과 직결된다. 특히 어려움을 겪고 있는 농어민들과의 신뢰와 공감대를 바탕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18년 출범한 CPTPP는 태평양 연안에 있는 일본, 호주, 캐나다, 멕시코, 칠레, 베트남, 영국 등 12개국이 참여한 ‘메가 FTA’(대형 다자 자유무역협정)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세계무역기구(WTO) 중심 다자주의가 훼손된 상황에서 자유무역 체제의 유력한 대안으로 거론됐다. 당초 이 대통령은 지난 1월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CPTPP 추진 의사를 재확인했고, 지난 7월 말 한·칠레 정상회담에서도 칠레와의 CPTPP 협력을 약속했다. 구윤철 전 경제부총리는 지난 8월 말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CPTPP 가입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사회적 논의를 본격화하겠다고 밝혔다.
이재명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지난 1월 14일 일본 나라현 호류지를 방문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당시 정상회담에서 CPTPP 추진 의사를 재확인했다. 뉴스1
이를 위해 산업통상부 등 관계 부처가 지난달 28일 발표한 ‘CPTPP 가입에 따른 경제적 영향분석’ 잠정 결과에 따르면, CPTPP가입 시 국내 제조업 생산은 향후 15년간 연평균 6조원대 증가하고, 농림수산업 분야는 연평균 8500억원 정도 감소한다는 전망이 나왔다. 이 결과를 토대로 정부는 지난 6일 국무회의에서 비공개 토의를 했다. 오는 11월 CPTPP 장관회의에서 한국의 가입을 논의하기 위해선 10월 중순 관보에 공정회 개최 계획을 공지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참석자들의 의견을 들은 뒤 “정책 추진은 농업인들의 신뢰 및 공감대를 전제로 국익을 따져야 한다”며 “결론을 정해놓고 서두르지 말고 원점에서 다시 대화를 시작해 볼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이틀 뒤인 8일 연내 가입 신청을 하지 않기로 했다.
지난 8일 충남과 충북 등 농민단체 회원들이 세종시 장군면 대교천교에서부터 정부세종청사까지 포괄적 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 추진 중단을 요구하며 트랙터와 트럭 100여대를 끌고 나와 가두시위를 벌이고 있다. 김성태 객원기자
이 대통령의 이같은 결정은 가속화하는 농심(農心) 이반을 막기 위한 조치로 해석된다. 앞서 농림·축산·수산·임업 분야 75개 단체는 지난달 ‘CPTPP 가입저지 농림축수산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오늘 15일 서울에서 대규모 총궐기 집회를 열겠다고 예고했다. 이런 가운데 정부의 농지 전수조사를 둘러싼 논란은 성난 농심에 기름을 부었다. 정부는 농어촌상생기금 1조원을 채우기 위해 내년 2000억원, 향후 5000억원을 투입하기로 한 데 이어, CPTPP 연내 가입 신청까지 최종 포기했다.
다만 일각에선 제조업 수출 확대를 위해 절실한 CPTPP 가입이 2013년과 2021년에 이어 또다시 무산된 데 대한 아쉬움도 나온다.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은 “이 대통령이 이영수 농림축산비서관 등 전농(전국농민회총연맹) 출신들의 ‘원리주의적 사고’에 둘러싸였다”며 “국정 방향이 다소 경도된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