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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도 없는 미국 최고(最古) 명문…시카고 골프클럽에 들어가 봤다

중앙일보

2026.10.08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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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골프클럽 클럽하우스가 아침 햇살을 받고 있다. 하얀 회벽과 붉은 기와지붕, 작은 시계탑이 130여 년을 지켜 온 클럽의 소박한 품격을 보여준다. 성호준 기자

시카고 골프클럽 클럽하우스가 아침 햇살을 받고 있다. 하얀 회벽과 붉은 기와지붕, 작은 시계탑이 130여 년을 지켜 온 클럽의 소박한 품격을 보여준다. 성호준 기자

시카고 서쪽 교외의 시카고 골프클럽에는 간판이 보이지 않았다. 정문이라 할 만한 거창한 입구도 없었다. 주차장은 50대남짓 댈 수 있어 보였다. 클럽하우스도 아담했다. 하얀 회벽에 붉은 기와지붕을 얹은 2층 건물 한가운데 작은 시계탑 하나가 솟아 있을 뿐, 화려한 조각도 큼직한 로고도 없었다.

이곳은 미국을 대표하는 명문 클럽이다. 1894년 미국골프협회(USGA)를 세운 5개 클럽 가운데 하나다. 폐쇄적이기로도 손꼽힌다. 흑인 회원을 처음 받은 게 1993년, 여성 회원은 2001년이다. 회원이 많지 않고 외부 방문객을 거의 받지 않으니 큰 주차장도, 웅장한 클럽하우스도 필요 없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클럽 중 하나가 시골 클럽처럼 소박했다. 세상에 굳이 자신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 같았다.

1번 홀 티잉구역에서 사방을 둘러봐도 코스 밖 건물이 보이지 않았다. 미국 3대 도시 시카고의 교외인데도 멀리 물탱크 하나가 솟아 있을 뿐이었다. 페어웨이 너머 아파트 숲에 익숙한 한국 골퍼에게는 시간여행 같았다. 19세기 말 골프장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이른 아침 안개가 깔린 시카고 골프 클럽. 멀리 물탱크를 제외하곤 건물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성호준 기자

이른 아침 안개가 깔린 시카고 골프 클럽. 멀리 물탱크를 제외하곤 건물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성호준 기자


맥도널드가 옮겨 심은 스코틀랜드

이 클럽은 골프의 성지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 올드코스와 핏줄로 이어져 있다. 1892년 문을 연 시카고 골프클럽은 미국 최초의 18홀 골프장이다. 18홀을 골프의 표준으로 만든 곳이 바로 세인트앤드루스다. 그 표준을 들여온 사람은 찰스 블레어 맥도널드다. 시카고 부잣집 아들이던 그는 1872년 열여섯 살에 세인트앤드루스 대학으로 유학을 가 올드 톰 모리스에게 골프를 배웠다. 귀국한 뒤 시카고 골프클럽을 세웠고 USGA 창립을 주도했다. 그래서 그는 ‘미국 골프 코스 설계의 아버지’로 불린다.

맥도널드는 미국 땅에 스코틀랜드를 옮겨 심으려 했다. 영국의 명홀을 연구해 그 원리를 자기 코스에 재현했다. 이른바 ‘템플릿 홀’이다. 홀 이름에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2번 홀 ‘로드’는 올드코스 17번 홀에서, 13번 홀 ‘에덴’은 올드코스 11번 홀에서 따왔다. 7번 홀 ‘레단’은 노스베릭의 명홀이다. 스코틀랜드를 돌며 수없이 들었던 이름들을 다시 만나니 낯선 땅에서 고향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지금의 코스는 1923년 맥도널드와 수제자 세스 레이너가 다시 만든 것이다. 그 뒤 100년 동안 거의 그대로다. 최근 손질도 메워졌던 벙커를 되살리는 정도였다. USGA는 이곳을 ‘템플릿 홀의 살아 있는 전시장’으로 평가한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벤트그래스 그린을 깔았고, 1897년에는 북동부 밖에서 처음으로 US오픈을 열었다. 코스 밖 주택가로 공이 날아가는 일이 잦아지자 ‘아웃 오브 바운즈(OB)’ 규칙이 이곳에서 생겼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시카고 골프 클럽 클럽하우스 내부. 클럽의 역사가 전시되어 있다. 성호준 기자

시카고 골프 클럽 클럽하우스 내부. 클럽의 역사가 전시되어 있다. 성호준 기자


밋밋한 풍경, 교묘한 그린

풍경은 밋밋하다. 바다 전망도, 바람에 깎인 모래언덕도, 홀마다 흐르는 개울도 없다. 올드코스도 그렇다. 황무지 같은 땅에 무덤 같은 둔덕이 솟아 있을 뿐이다. 볼거리가 없으니 오히려 코스가 더 잘 보인다. 시카고에서는 맥도널드와 레이너의 사려 깊은 전략이 맨얼굴로 드러난다.

시카고 골프 클럽 1번 홀 그린에서 바라본 클럽하우스. 성호준 기자

시카고 골프 클럽 1번 홀 그린에서 바라본 클럽하우스. 성호준 기자

코스는 어렵다. 우선 길다. 19세기에 만든 코스인데 파4인 1, 2번 홀이 모두 440야드가 넘고, 파3인 3번 홀도 200야드를 넘는다. 개장 때부터 이렇게 길지는 않았을 테니 조금씩 늘려 왔을 것이다. 넓은 땅에 지은 명문 코스라 전장을 늘릴 여유가 있었다.

클래식 코스의 진짜 어려움은 그린에 있다. 빠르고 단단하다. 몇 홀을 빼면 그린이 넓은데 기복이 심하고 경사가 교묘하다. 친절하고 눈 밝은 캐디가 없었다면 헤맸을 것이다. 캐디는 한국에서 1년간 영어 교사를 했다고 했다. 지금은 미국 명문 골프장을 돌며 캐디를 하는데, 가장 좋아하는 곳이 LA 컨트리클럽과 이곳이란다.

올드코스의 거대한 더블 그린처럼 핀 위치에 따라 같은 홀이 전혀 다른 홀이 된다. 공략 각도도, 샷의 모양도 매번 달라진다. 벙커가 그린을 빙 둘러싼 홀이 많아 벙커샷이 길면 반대편 벙커에서 다시 쳐야 한다. 정답이 하나가 아니고 창의적인 플레이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이곳은 올드코스의 직계 후손이다.

시카고 골프 클럽의 스코어카드. 필자는 89타를 쳤다. 성호준 기자

시카고 골프 클럽의 스코어카드. 필자는 89타를 쳤다. 성호준 기자

보드카 한 잔과 바꾼 더블보기

나는 전반에 41타를 쳤다. 2m 버디 퍼트를 놓친 대신 20m 버디 퍼트를 넣었다. 9홀을 마치고 보드카와 맥주를 마셨다. 10번 홀 그린에서 친 퍼트가 그린 밖으로 굴러 나가 더블보기를 했고, 그 뒤로 무너졌다. 후반은 48타였다. 그래도 모든 게 만족스러웠다. 천국에서 하루를 보낸 기분이었다.

14번 홀 옆에는 맥도널드가 살던 집이 있다. 미국 곳곳에 명코스를 남긴 그가 이 홀 옆에 집을 지었다. 스코틀랜드에서 골프를 배운 열여섯 살 소년이 평생 걸려 미국 땅에 옮겨 심은 올드코스. 그는 그 곁에서 여생을 보냈다. 골프를 사랑한 사람이 마지막에 머물고 싶은 곳은 결국 이런 코스일 것이다.
메디나 컨트리클럽의 클럽하우스 로툰다. 무어 양식의 아치와 손으로 그린 모자이크 천장이 1920년대 대호황기의 화려함을 보여준다. 성호준 기자

메디나 컨트리클럽의 클럽하우스 로툰다. 무어 양식의 아치와 손으로 그린 모자이크 천장이 1920년대 대호황기의 화려함을 보여준다. 성호준 기자


내가 시카고에 간 건 프레지던츠컵 때문이었다. 대회가 열린 메디나 컨트리클럽은 1920년대 미국 대호황기의 과시욕이 고스란히 응축된,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클럽일 것이다. 대형 로툰다(원형 홀)의 천장은 손으로 그린 정교한 모자이크로 덮여 있고, 그랜드 볼룸의 벽화와 천장화는 피렌체 대성당에 견줄 만큼 웅장하다.

메디나는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끊임없이 말을 건다. 시카고 골프클럽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간판조차 걸지 않았다. 130년 넘게 골프만으로 증명해 온 클럽에 간판은 필요 없었다. 나는 시카고 골프클럽에서의 라운드 한 번을 메디나에서의 세 번과 바꾸지 않겠다.

성호준([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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