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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로봇 엔지니어 때려치우고…5대 금박장 된 사연 [스튜디오486]

중앙일보

2026.10.09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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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튜디오486]은 중앙일보 사진부 기자들이 발로 뛰어 만든 포토스토리를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중앙일보는 상암산로 48-6에 있습니다. "
“금박의 아름다움은 금의 양이 아니라 문양과 여백에서 나옵니다.”
국가무형유산 김기호 금박장이 서울 종로구 무계원에서 비단에 순금박 작업을 한 '천상열차분야지도'옆에 서있다.

국가무형유산 김기호 금박장이 서울 종로구 무계원에서 비단에 순금박 작업을 한 '천상열차분야지도'옆에 서있다.

5대 금박장 김기호 장인의 손끝에서 얇은 금박이 비단 위에 내려앉았다.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문지르자 목판에 새겨진 문양이 선명한 금빛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풀의 농도와 누르는 힘이 조금만 달라도 빛의 결이 달라진다. 기계로 대신할 수 없는 섬세한 작업이다.
국가무형유산 김기호 금박장이 서울 종로구 금박연에서 비단에 금박 문양을 새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

국가무형유산 김기호 금박장이 서울 종로구 금박연에서 비단에 금박 문양을 새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

손가락으로 금박을 두드려 비단에 밀착시키며 문양을 완성하고 있다. 이 과정을 ‘부금(付金)’이라 한다.

손가락으로 금박을 두드려 비단에 밀착시키며 문양을 완성하고 있다. 이 과정을 ‘부금(付金)’이라 한다.

금박 공예는 문양을 새길 목판인 ‘금판’을 만드는 데서 시작한다. 결이 곱고 단단한 돌배나무 표면을 붉게 칠한 뒤 먹으로 도안을 그린다. 이어 조각칼로 붉은 부분을 파내면 금박으로 찍어낼 검은 선만 남는다. 붉은색은 새길 곳과 남길 곳을 구분해 작업의 정확성을 높인다.
김 장인이 돌배나무에 문양을 조각해 금박 작업에 사용하는 ‘금판’을 만들고 있다.

김 장인이 돌배나무에 문양을 조각해 금박 작업에 사용하는 ‘금판’을 만들고 있다.

완성한 금판에 풀을 바르고 순금을 얇게 편 금박을 올린다. 이를 비단 위에 찍은 뒤 손가락으로 문질러 밀착시키면 금빛 문양이 완성된다. 이 과정을 ‘부금(付金)’이라 한다. 조선시대에는 이 일을 하는 장인을 ‘부금장’이라 불렀지만, 지금은 ‘금박장’이라 한다.
금판을 만들고 있는 서울 종로구 금박연 작업실.

금판을 만들고 있는 서울 종로구 금박연 작업실.

접착제로는 전통적으로 소가죽이나 뼈를 고아 만든 아교, 민어 부레로 만든 어교를 사용했다. 어교는 탄성과 접착력이 뛰어나지만 약 5초 만에 굳을 만큼 건조가 빨라 농도를 맞추기가 까다롭다. 지금은 작업에 따라 개량풀도 함께 쓴다.
비단에 금박 문양을 새기기 위해 ‘금판’에 접착제를 바르고 있다.

비단에 금박 문양을 새기기 위해 ‘금판’에 접착제를 바르고 있다.

김 장인은 금박 공예를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 비유했다. 풀의 농도와 두께를 조절해 금박을 정확하게 붙이는 기술이 하드웨어라면, 문양을 설계하고 배치해 작품의 전체 구성을 완성하는 디자인은 소프트웨어에 해당한다.
비단에 접착제를 바른 ‘금판’을 찍고 있다. 한 번 찍으면 되돌릴 수 없어 신중하게 위치를 잡아야 한다.

비단에 접착제를 바른 ‘금판’을 찍고 있다. 한 번 찍으면 되돌릴 수 없어 신중하게 위치를 잡아야 한다.

“금박을 붙이는 기술보다 무엇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가 더 중요합니다. 디자인과 조각이 작업의 90%를 차지한다고 생각해요.”
김 장인이 금박 문양을 새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

김 장인이 금박 문양을 새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

금색은 하나지만 표현은 무궁무진하다. 선의 굵기와 여백, 누르는 압력에 따라 광택과 입체감이 달라진다.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제작할 때는 은하수를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빛이 덜 나는 금가루를 사용했다. 하나의 금빛만으로 명암과 깊이를 만들어낸 것이다.
캔버스에 금박을 입힌 작품 ‘금빛 궤도’. 태양빛을 표현하기 위해 조명을 활용한 다양한 연출을 시도했다.

캔버스에 금박을 입힌 작품 ‘금빛 궤도’. 태양빛을 표현하기 위해 조명을 활용한 다양한 연출을 시도했다.

캔버스에 금박을 입혀 완성한 작품 ‘금빛 우주’.

캔버스에 금박을 입혀 완성한 작품 ‘금빛 우주’.

김 장인이 보유한 금판은 500종이 넘는다. 작은 문양은 하루 만에 만들기도 하지만 복잡한 것은 구상부터 완성까지 1년 가까이 걸린다. 용 문양 하나를 새기는 데 두 달이 걸린 적도 있다. 꽃당수복은 장수와 복을, 박쥐는 복을, 모란은 부귀영화를, 나비는 행복을 상징한다. 같은 금판을 사용해도 문양의 조합과 배치에 따라 작품의 인상은 전혀 달라진다.
김 장인의 조상이 궁중에서 일하던 조선시대부터 대대로 사용해 온 금판. 왼쪽부터 꽃당수복·당수복·구름·박쥐·난초 문양.

김 장인의 조상이 궁중에서 일하던 조선시대부터 대대로 사용해 온 금판. 왼쪽부터 꽃당수복·당수복·구름·박쥐·난초 문양.

금박 작업에 사용하는 대형 ‘금판’과 조각 도구.

금박 작업에 사용하는 대형 ‘금판’과 조각 도구.

전통 문양은 그의 손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난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사신도와 천마총의 천마, 고려불화와 조선 왕실 복식 속 봉황을 금박에 맞게 다시 도안했다. 최근에는 현대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서 영감을 얻은 까치호랑이 문양도 만들었다.
비단 위에 금박을 입히고 있다.

비단 위에 금박을 입히고 있다.

처음에는 양각으로만 새겼지만, 금빛이 지나치게 무거워 보이자 즉석에서 음각판을 추가했다. 두 문양을 교차해 깊이를 더한 180㎝ 크기의 보자기는 뉴욕 전시에서도 소개됐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까치호랑이 금판.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까치호랑이 금판.

까치호랑이 행진 보자기. 사진 금박연

까치호랑이 행진 보자기. 사진 금박연

까치호랑이 행진 보자기. 사진 금박연

까치호랑이 행진 보자기. 사진 금박연

금박은 본래 왕비와 공주, 옹주 등의 혼례복과 예복을 장식하던 왕실 문화였다. 왕실이 사라진 뒤에는 혼례와 돌잔치 복식을 통해 민간으로 퍼졌다. 오늘날에는 한복을 넘어 넥타이와 스카프, 보석함, 가리개 등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외교 선물과 기업 협업 작품에도 금박이 활용된다.
화려한 금박 문양으로 장식한 왕실 여성의 예복 ‘홍원삼’.

화려한 금박 문양으로 장식한 왕실 여성의 예복 ‘홍원삼’.

김 장인은 1993~1997년까지 삼성전자에서 로봇을 설계한 엔지니어였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곁에서 돌배나무를 자르고 금판을 씻으며 익힌 감각은 결국 그를 다시 가업으로 이끌었다.
김 장인이 비단에 입힌 금박 문양의 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김 장인이 비단에 입힌 금박 문양의 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과학과 예술은 다르지 않습니다. 새로운 것을 찾고 끊임없이 시험한다는 점에서는 같아요.”
지금은 애니메이션을 전공한 아들이 6대 계승자로 기술을 배우고 있다. 김 장인은 한복과 같은 전통 복식에는 옛 방식을 철저히 지키되, 새로운 분야에서는 자유로운 창작을 이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앞으로는 방 하나를 우주처럼 꾸미는 ‘공간 예술’에도 도전하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김 장인의 작업과 예술적 가치를 조명하는 전시 ‘금별, 우주를 만나다’가 9월 10일부터 11월 1일까지 서울 종로구 '무계원'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에서는 전통 금박 기법을 바탕으로 새로운 표현 영역을 개척해 온 그의 작품 세계를 만날 수 있다.
김 장인이 캔버스에 금박을 입힌 대표작 ‘금빛 궤도’ 앞에 서 있다.

김 장인이 캔버스에 금박을 입힌 대표작 ‘금빛 궤도’ 앞에 서 있다.

얇은 금박 한 장이 장인의 손끝에서 빛과 이야기를 얻는다. 왕실의 옷을 수놓았던 오래된 기술은 5대를 지나 새로운 재료와 공간으로 향하고 있다. 전통을 지키되 그 안에 머물지 않는 금빛이 이제 6대의 손끝으로 이어지고 있다.





김종호([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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