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예절부터 가르칩니다”… 한국 농구 씨앗 뿌리는 여자농구 ‘왕언니’ 유영주

중앙일보

2026.10.09 16:00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글자 크기 조절
기사 공유
1994년 히로시아 아시안게임 금메달의 주역인 유영주 전 부산 BNK 감독이 초등학생들에게 농구를 가르치고 있다. 김경록 기자

1994년 히로시아 아시안게임 금메달의 주역인 유영주 전 부산 BNK 감독이 초등학생들에게 농구를 가르치고 있다. 김경록 기자

1990년대 한국 여자농구를 호령했던 ‘왕언니’ 유영주 전 부산 BNK 감독이 초등학교에서 농구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

지난달 17일 인천 연수구 옥련초등학교 체육관에서 5학년 학생 20여명을 대상으로 직접 농구 수업을 진행하는 유 전 감독을 만났다. 골밑에서 상대 센터와 몸싸움에서 밀리지 않던 든든한 파워포워드로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금메달의 주역이던 그가 이제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농구의 매력을 전하고 있었다.


2019~2021년 여자 프로농구 부산BNK의 사령탑 시절 카리스마 넘치던 모습과 달리 이날 유 전 감독은 자상하게 학생들과 눈높이를 맞췄다. 넘어진 학생을 살뜰히 살피고, 실수를 한 학생에게는 격려의 박수를 유도했다. “선수들이 이 모습을 보면 깜짝 놀라겠다”는 농담에 그는 “초등학생을 가르칠 땐 신경 쓸 게 정말 많다. 선수들도 이렇게 가르쳤으면 인기가 좋았을 것”이라며 미소 지었다.


유 전 감독은 9월부터 11월까지 매주 화~금요일, 하루 4시간씩 4~6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농구 기초 수업을 이끌고 있다. 특별 수업이 아니라 엄연한 정규 교과다. 8차시에 걸쳐 드리블부터 패스, 슈팅 등을 가르친다.

이날 수업은 농구공을 이용한 릴레이로 팀플레이의 가치를 깨닫고, 드리블의 기본기를 익히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드리블 자세를 시연한 뒤 “손바닥으로 드리블하면 안 된다”, “허리는 펴고 허벅지를 낮춰라”, “배꼽 높이로 드리블하라”며 세세하게 맞춤형 지도를 이어갔다. 유 감독은 “다음 수업 땐 드리블을 이용한 놀이를 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현장 담임 교사는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농구와 친해지도록 수업을 구성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라며 “유명한 농구 스타에게 직접 배운다는 사실에 아이들의 자부심도 크다”고 전했다.


이 같은 현장 교육은 한국여자농구연맹(WKBL)이 추진 중인 유소년 농구 활성화 사업의 일환이다. 지난 2016년 시작해 올해로 10년 차를 맞은 이 사업은 은퇴한 여자 농구 선수를 재교육해 유소년 농구 지도자로 재교육한다. 지금은 서울, 경기, 인천, 전북, 제주, 청주 등 각급 교육청과 협력해 매년 약 150명의 강사가 4만여명의 학생들에게 농구를 전파하고 있다. 김일구 WKBL 홍보팀장은 “은퇴한 선수들에게는 새로운 경력을 이어갈 기회를 제공하고, 농구 저변을 넓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유 전 감독이 유소년 지도에 발을 들인 계기는 지난 2018년 WKBL의 갑작스러운 요청으로 시작됐다. 그는 “WKBL에서 제주도에 강사가 펑크났다고 도움을 요청해 시작한 일이 지금까지 이어졌다”며 “지난해에는 연평도에서 열흘간, 올해는 백령도에서 일주일간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떠올렸다.


섬마을까지 찾아가는 열정 속에서 보람도 깊어지고 있다. 유 전 감독은 “농구계에만 있을 때는 몰랐는데 교육 현장에 와보니 농구공 한 번 잡아보지 않은 학생이 태반이었다. 농구의 혜택을 많이 받은 사람으로서 농구를 더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이 생겼다”며 “연평도에서 가르쳤던 학생 한 명이 최근 인천 지역 클럽에 가입해 농구를 계속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뿌듯했다”고 활짝 웃었다.


드리블이나 슛 기술을 가르칠 것 같지만, 유 전 감독이 수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꼽는 덕목은 의외로 ‘예의범절’이다. 그는 “예절을 지키고 규칙을 따르는 것이 내가 농구를 통해 배운 가장 소중한 가치”라며 “선생님을 만나면 90도로 인사하고, 체육관에서는 물병 하나도 가지런히 정리하도록 엄격하게 지도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따뜻한 손길과 우렁찬 호령과 함께 제2의 한국 농구의 꿈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이해준([email protected])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