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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이룬 한국 첫 노벨과학상의 꿈…사재 3000억 턴 회장님 [비크닉]

중앙일보

2026.10.09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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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생리의학상을 시작으로 6일 물리학상, 7일 화학상까지 사흘 연속 과학 분야 노벨상이 발표됐다. 올해 생리의학상은 광유전학을 개척한 칼 다이서로스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 페터 헤게만 독일 베를린 훔볼트대 교수, 게오르크 나겔 독일 뷔르츠부르크대 교수가 공동 수상했다. 물리학상은 프랜시스 할젠 미국 위스콘신대 매디슨 교수, 화학상은 앙리 카강 프랑스 파리사클레대 명예교수와 소아이 겐소 일본 도쿄이과대 명예교수에게 돌아갔다.

전 세계의 시선이 스웨덴 스톡홀름으로 향했던 가운데, 한국 과학계의 숙원은 올해도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한국은 최초의 과학 분야 노벨상을 기다리는 중이다.

기초 과학 연구는 당장 성과를 내기 어렵다. 어떤 질문이 빛나는 성과로 이어질지 초기 연구 시점에서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일례로 올해 생리의학상을 받은 광유전학은 빛으로 특정 뇌세포를 켜고 끌 수 있게 한 기술이다. 이 연구의 출발점은 뜻밖에도 녹조류였다. 헤게만과 나겔은 녹조류가 빛을 감지할 때 쓰는 단백질인 ‘채널로돕신’을 발견했다. 다이서로스가 이 단백질을 동물의 신경세포에 넣으면서, 녹조류 단백질이 뇌과학의 스위치가 됐다. 결국 많은 질문에 오래 투자하는 것 외에는 연구 성과를 예측하는 방법이 사실상 없다는 얘기다. 단기 성과 위주의 국내 연구 환경에 대한 아쉬움이 노벨상 발표 시즌마다 반복되는 이유다.
지난 8월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 본사에서 열린 서경배과학재단 설립 10주년 기념 'SUHF 심포지엄 2026' 현장. 사진 서경배과학재단

지난 8월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 본사에서 열린 서경배과학재단 설립 10주년 기념 'SUHF 심포지엄 2026' 현장. 사진 서경배과학재단

정부 차원은 물론 민간 분야 지원도 중요하다. 올해 노벨상 수상자 다이서로스는 하워드휴즈의학연구소(HHMI) 소속 연구자다. 이는 미국 사업가 하워드 휴즈가 1953년 세운 민간 재단이다. 하워드휴즈 소속이거나 출신으로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는 다이서로스가 36번째다. 한국에도 비슷한 시도가 있다. 바로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그룹 회장이 사재 3000억원을 출연해 세운 서경배과학재단(SUHF)이다.

미답지 향해 10년간 910억원
서경배과학재단은 지난 2016년 시작해 10년째 과학 연구를 지원해 온 공익재단이다. 국내외 한국인 신진 과학자를 대상으로 기초 생명과학, 의과학, 융합 바이오 분야의 독창적이고 도전적인 연구를 선발해 장기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현재까지 총 35명의 연구자를 선정했으며 지난 10년간 910억원의 연구비를 지원했다.

화장품 회사 회장이 과학을 후원한다면 피부 과학이나 소재 과학처럼 당장 연구개발(R&D)에 활용할 수 있는 응용 분야를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서경배과학재단은 철저히 기초 과학 분야를 우선한다. 재단이 내건 가치는 ‘천외유천(天外有天)’. 눈에 보이는 하늘 밖에도 하늘이 있다는 뜻이다. 응용 연구보다 아직 아무도 답을 찾지 못한 질문에 돈을 댄다.
고규영 카이스트 의과학대학원 특훈 교수.

고규영 카이스트 의과학대학원 특훈 교수.

국내서 민간이 기초 과학을 지원하는 사례는 드물다. 재단 이사인 고규영 카이스트 의과학대학원 교수는 “생명과학 분야에서 초기 연구자를 장기간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민간 공익 재단은 국내서 서경배과학재단이 사실상 유일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삼성미래기술육성사업도 대표적 민간 기초 과학 지원 사업이지만, 여러 과학·기술 분야를 폭넓게 지원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서경배과학재단은 지난해까지 한 명의 초기 독립 연구책임자에게 5년간 최대 25억원을 지원해왔다. 고 교수는 “1인당 연구비 기준으로는 미국 하워드휴즈의학연구소나 영국 웰컴트러스트 같은 해외 기관과 견줄만한 규모인데, 이를 성과가 검증된 연구자가 아닌 초기 연구자에게 자율성과 함께 준다는 점에서 국제적으로도 드문 사례”라고 설명했다.

올해부터는 지원 기간을 더 늘렸다. 연구 경과에 따라 후속 지원을 이어가는 ‘ABC 트랙’을 도입하면서, 연구자는 심사를 거쳐 최장 12년간 총 50억원의 연구비를 받을 수 있게 됐다. 고 교수는 “잠재력이 큰 젊은 생명과학자를 일찍 발견해, 큰 질문을 가지고 연구를 시작할 수 있도록 견고한 디딤돌을 놓아주는 것이 재단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아톰’에서 시작된 꿈
서경배 회장은 어린 시절 만화영화 ‘아톰’을 보고 과학이 세상을 바꾸는 모습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기업을 운영하면서도 과학에 대한 관심은 이어졌고, 지난 1992년 경기도 용인에 태평양종합기술연구소를 설립했다.

기술연구소는 1990년대에 비타민A 유도체인 레티노이드 성분을 화장품에 적용하는 연구에 성공했다. 이를 기반으로 출시한 아이오페 레티놀 제품은 회사의 경쟁력을 끌어올렸다. 과학이 기업을 성장시킬 수 있다는 걸 직접 확인한 경험이다. 동시에 한계도 봤다. 기업 연구소에서는 장기적 기초 과학 연구가 충분히 이뤄지기 어렵다는 점이다.
2024년 서경배과학재단 신진과학자 증서 수여식. 왼쪽부터 박승열 카이스트 생명과학과 교수,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그룹 회장, 이준용 연세대 의과대학 미생물학교실 교수. 사진 서경배과학재단

2024년 서경배과학재단 신진과학자 증서 수여식. 왼쪽부터 박승열 카이스트 생명과학과 교수,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그룹 회장, 이준용 연세대 의과대학 미생물학교실 교수. 사진 서경배과학재단

기초 과학 분야를 콕 집어 공익 재단을 만든 이유다. 재단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데도 의미가 있다. 재단은 이를 “스스로 물러설 여지를 없애고 자신의 이름에 책임을 지겠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10년, 변화가 보인다
서경배과학재단이 기초 과학 연구 지원을 해 온 시간은 10년. 사실 이 분야에서 10년은 성과를 말하기엔 짧은 시간이다. 그래도 변화는 보인다. 주목할만한 연구자는 1기의 이정호 카이스트 의과학대학원 교수다. 이 교수는 뇌에서 후천적으로 생기는 돌연변이를 연구해 왔고, 2018년 바이오벤처 소바젠을 창업했다. 지난해 9월에는 난치성 뇌전증 치료 후보물질 ‘SVG105’를 이탈리아 제약사 안젤리니 파마에 최대 5억5000만 달러(약 7400억원) 규모로 기술을 이전했다. 이밖에 다른 연구자들도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회원으로 선출되거나, 유전체 분석, mRNA 치료제 기업을 창업하는 등 학계와 산업계에서 차츰 성과를 내고 있다.
고규영 교수가 더 의미 있게 보는 변화는 따로 있다. 고 교수는 “지원받던 연구자가 이제 다른 연구자의 성장을 돕는 위치로 이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4월 말 재단 설립 10주년을 맞아 제주에서 열린 ‘오설록 콘퍼런스’가 대표적이다. ‘유전체 진화’를 주제로 해외 석학 18명과 국내 연구자 17명이 모였고, 영국 웰컴 생어 연구소의 마이크 스트래튼 교수 등이 주요 논의를 이끌었다. 행사를 공동 주최한 이는 이정호 교수와 주영석 카이스트 의과학대학원 교수로, 재단 초기에 지원받은 신진 과학자들이 세계 석학과 후배 연구자를 잇는 자리를 직접 만든 셈이다.

재단에 따르면 오설록 콘퍼런스는 일반적 대형 학회와 반대로 설계된 ‘대화의 장’이었다. 참가자 수를 적게 하되, 3박 4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같은 공간에 머물면서 아직 발표되지 않았거나 진행 중인 연구를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했다. 고 교수는 “공식 발표보다 이후 대화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며 “식사나 쉬는 시간 나눈 질문과 답이 새로운 실험 아이디어나 공동 연구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서경배과학재단의 첫 국제학술대회 '오설록 콘퍼런스' 현장. 오설록 콘퍼런스는 일반적 대형 학회와 반대로 설계된 ‘대화의 장’이었다.사진 서경배과학재단

서경배과학재단의 첫 국제학술대회 '오설록 콘퍼런스' 현장. 오설록 콘퍼런스는 일반적 대형 학회와 반대로 설계된 ‘대화의 장’이었다.사진 서경배과학재단


한국 과학계에 필요한 건 ‘시간을 허용하는 문화’
물론 민간 재단 하나로 한국 과학계가 바뀔 수 있는 건 아니다. 고 교수는 “국가 연구비 규모나 대학 제도, 연구자 처우 같은 문제는 민간 재단이 대신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대신 재단이 할 수 있는 일은 연구비를 주는 방식을 바꿔보는 것이다. 고 교수는 공적인 국가 시스템 아래에선 하기 어려운 일들을 꼽았다. 유망한 젊은 연구자를 믿고 꾸준히 지원하는 것, 성공 여부는 불확실하지만 잘되면 큰 발견으로 이어질 연구에 투자하는 것, 연구자가 중간에 자율적으로 방향을 바꿀 수 있게 하는 것, 필요하다면 10년 넘게 지원하는 것 등이다.

고 교수는 “재단의 역할은 한국 기초 과학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연구자를 믿고 지원해도 된다’는 하나의 사례를 만드는 것”이라며 “그 사례가 성공해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시도가 생긴다면, 작은 재단 하나가 연구 문화의 변화를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지난 8월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 본사에서 열린 서경배과학재단 설립 10주년 기념 'SUHF 심포지엄 2026' 에서 재단 이사장인 서경배 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 서경배과학재단

지난 8월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 본사에서 열린 서경배과학재단 설립 10주년 기념 'SUHF 심포지엄 2026' 에서 재단 이사장인 서경배 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 서경배과학재단

언젠가 한국의 기초 과학 분야 노벨상도 가능할까? 고 교수는 “가능성은 충분하다”면서도 “언제 받을 것인가보다는, 노벨상급 발견이 계속 나올 수 있는 연구 환경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한국 과학계에 가장 필요한 것으로 연구비보다 ‘시간을 허용하는 문화’를 꼽았다. 연구비가 많아도 짧은 기간에 성과를 증명해야 한다면 연구자는 결국 결과가 잘 나올 만한 문제만 고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재단은 노벨상을 목표로 내세우지 않는다. 고 교수는 “노벨상은 목표라기보다 건강한 기초 과학 생태계가 오랜 시간 쌓인 뒤 나타나는 결과에 가깝다”고 말했다.
b.애쓰지
저 회사는 정의로울까? 과거 기업의 평가 기준은 숫자였습니다. 요즘은 환경(Environmental)에 대한 책임, 사회(Social)적 영향, 투명한 지배구조(Governance) 등 이른바 ‘ESG 관점’에서 기업을 판단합니다. 비크닉은 성장과 생존을 위해 ESG에 애쓰는 기업과 브랜드를 조명합니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격언은 잠시 잊어주세요. 착한 일은 널리 알리는 게 미덕인 시대니까요.





유지연([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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