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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만 스크린 복귀에 “엄청 망설였다”…김혜자 마음 돌린 손편지

중앙일보

2026.10.11 00:30 2026.10.11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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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혜자가 8일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 야외무대에서 열린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여전히 찬란하게' 야외무대인사에 참석해 인사하고 있다. 부산=송봉근 객원기자

배우 김혜자가 8일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 야외무대에서 열린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여전히 찬란하게' 야외무대인사에 참석해 인사하고 있다. 부산=송봉근 객원기자

“하루하루는 지독시리도 안 가는데 10년, 20년은 금방 지나가더라.”
스크린 속 김혜자(85)의 아스라한 목소리에, 극장 곳곳에서 흐느낌이 들려왔다. 1942년 일제강점기 꽃다웠던 산골 소녀들의 이루지 못한 꿈이 아프게 스쳐가서다. 김혜자의 9년 만의 영화 복귀작 ‘여전히 찬란하게’(감독 송일곤)가 지난 8일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최초 공개됐다.

1961년 KBS 1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김혜자의 65년 연기 내공이 뚜렷한 영화다. 17살에 헤어진 단짝 순옥(김혜자)과 정임(차미경)이 노년에 재회해 되새겨낸 그 시절의 추억을 그렸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소재의 영화지만, 역사가 빼앗아가지 않았다면 소녀들이 마땅히 누렸을 청춘 시절의 찬란함을 더욱 부각했다.

일본군이 처녀를 잡아간다는 소문에 두 소녀는 시체를 태우는 화장막에 숨어 살게 된다. 살풍경한 현실에도 한글을 익혀 악보를 읽게 되고 첫사랑에 눈뜨는 나날이 상상 속 뮤지컬 장면 등에 꿈결처럼 담겼다.

이들의 이야기는 정임의 치매 증세가 드러날 때마다 새로운 진실을 끄집어내며 시시각각 분위기가 반전된다. 그에 맞춰 김혜자의 눈빛도 바뀐다. 대형 화면에 클로즈업된 그의 말간 눈망울, 미소 짓다가도 서늘해지는 표정 연기 자체가 스펙터클이다.

올곧게 시대를 관통해온 사람, 역사에 희생된 아까운 목숨들 앞에 살아남은 자신의 존재 자체로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 그 시린 아픔을 묵묵히 껴안고 살아온 사람…. ‘여전히 찬란하게’ 속 순옥의 얼굴에는 김혜자가 그간 안방극장을 웃기고 울렸던 시대의 얼굴들이 시시각각 겹쳐지기도 한다.
영화 '여전히 찬란하게'는 1941년 일제강점기 생애 가장 찬란했던 17살 시절을 함께한 단짝 친구 정임을 60년 만에 다시 만난 순옥(김혜자)의 이야기를 담았다. 사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영화 '여전히 찬란하게'는 1941년 일제강점기 생애 가장 찬란했던 17살 시절을 함께한 단짝 친구 정임을 60년 만에 다시 만난 순옥(김혜자)의 이야기를 담았다. 사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영화를 자주 하는 사람도 아니고 엄청 망설이다가 했어요. 이 영화가 여러분들 마음을 어루만져주면 좋겠어요.”

8일 영화 상영에 앞서 부산 영화의전당에서 진행된 야외 무대인사에서 그의 해사한 미소에 1000여명 군중이 화답했다. 이틀 전 개막식에선 붉은 고름을 맨 연분홍색 한복 자림으로 레드카펫에 선 그다. 자주 기침하고 부축받는 모습에 일각에선 건강 이상설도 나왔지만, 영화사 측은 “단순 감기 기운”이라 설명했다. 일찌감치 매진된 이날 상영에서 그는 다소 기운을 차린 듯 객석을 향해 “영화를 잘 모르지만 이 작품(시나리오)은 읽으면서 텔레비젼에 틀어도 참 멋있겠구나, 했다. 좋은 대본 훌륭한 감독을 믿고 용기를 냈으니 여러분들이 많이 점수를 주시면 좋겠다”고 농담도 던졌다.

드라마를 60여편 할 동안 그가 출연한 영화는 오는 21일 개봉 예정인 ‘여전히 찬란하게’까지 포함해 7편에 불과하다. 봉준호 감독의 ‘마더’(2009)를 비롯해 ‘눈물의 여인’(1969), ‘만추’(1982), ‘마요네즈’(1999),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2014), ‘길’(2017) 등이다.
 배우 김혜자(왼쪽)가 6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 전당에서 열린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식 레드카펫 행사에서 송일곤 감독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배우 김혜자(왼쪽)가 6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 전당에서 열린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식 레드카펫 행사에서 송일곤 감독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영화가 익숙지 않아 피하려 했다”는 그의 마음을, 송일곤 감독이 여섯 번 집으로 찾아간 ‘육(六)고초려’로 돌렸다. 이날 무대인사에서 송일곤 감독은 “김혜자 선생님 캐스팅이 살면서 가장 어려웠다”면서 “‘들꽃처럼, 이름 없는 꽃처럼 있고 싶다’며 거절한 선생님을 편지로 설득했다”고 말했다. 감독의 손편지에 비로소 시나리오를 읽은 김혜자의 첫 감상은 “참 울림이 큰 영화, 슬픈 역사”라는 것. “아름답게 살아야 할 아이들이 겪는 일을 너무 아름답게, 또 가슴 아프게 표현했다. 내 연기로 여러 사람과 나누고 싶었다”고 그는 영화사를 통해 출연 이유를 밝혔다.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젊은비평가상을 받은 ‘꽃섬’(2001)을 비롯해 ‘미안해, 고마워’(2011), ‘오직 그대만’(2011) 등 위로의 영화를 만들어온 송 감독은 이번 영화를 “한 사람에 대한 연민, 그리움, 사랑에 관한 영화”라며 “이런 단어에서 김혜자 선생님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김혜자의 따뜻한 눈빛에 상실과 기다림을 건너온 세월이 담겨있었다” “극장 안이 훌쩍이는 소리로 가득했다” “김혜자 선생님이 영화를 해주셔서, 여전히 연기해주셔서 그저 감사할 따름”(왓챠피디아 관람평) 등 호평을 남겼다.

영화 '여전히 찬란하게'에서 순옥(김혜자)은 기억을 잃어가는 정임(차미경, 오른쪽)과 노래 대회에 나가려고 한다. 정임이 추억의 노래를 다시 불러주길 바라며 먼저 노래하고 익살을 부리기도 한다. 사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영화 '여전히 찬란하게'에서 순옥(김혜자)은 기억을 잃어가는 정임(차미경, 오른쪽)과 노래 대회에 나가려고 한다. 정임이 추억의 노래를 다시 불러주길 바라며 먼저 노래하고 익살을 부리기도 한다. 사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한편 김혜자의 데뷔 65년을 기념해 지난 4일 SBS는 특집 다큐멘터리 ‘김혜자의 안부-죽지 마세요’를 방송했다. 남동생이 한강에 빠져 요절한 뒤 수차례 한강을 찾아 죽으려고 할 만큼 우울증이 깊었다는 그는 아프리카 봉사·후원 활동을 하며 살아갈 힘을 얻었다. “우선 좋은 배우가 돼야, 사람들이 배우로 인정해줘야 남을 돕는 데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다큐에서 밝힌 그의 연기 철학은 ‘여전히 찬란하게’에도 이어지는 주제다.
송일곤 감독(왼쪽부터), 박서경, 김혜자, 최주은, 문서현, 이세영이 8일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 전당 루프씨어터에서 열린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영화 '여전히 찬란하게' 야외무대인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송일곤 감독(왼쪽부터), 박서경, 김혜자, 최주은, 문서현, 이세영이 8일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 전당 루프씨어터에서 열린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영화 '여전히 찬란하게' 야외무대인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나원정([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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