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예능프로그램 '전지적 참견 시점'에서 인플루언서이자 AI 연구원인 허성범이 AI 기업들의 헌책 학습에 대해 말하고 있다. MBC 캡처
인공지능(AI) 기업이 배후에서 주도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헌책 대량 매입 시도가 11일 한국에서도 확인됐다. 미국과 독일, 아일랜드, 일본 등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보도돼 논란이 확산하고 있는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AI 기업이 중고 서적을 대량으로 사들여 AI 학습에 활용한 뒤 파기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서울 신천동에 있는 서점 겸 문화공간 서울책보고는 지난 8월 중순 이상한 이메일 하나를 받았다. 자신을 미국 애리조나주 도서 유통회사 B사의 구매 총괄 담당자라고 소개한 C씨는 자신의 회사를 “미국에서 도서를 대량으로 매입하여 재판매하는 회사”라고 소개했다. 이어 한국어로 된 헌책을 대량 구매하고 싶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한국어 일반 단행본(성인 대상 교양·문학·실용서 등)을 팔레트 또는 컨테이너 단위로 정기적으로 매입할 공급처를 찾고 있다”고 했다. 컨테이너 하나에 책은 5만~8만권 들어간다. C씨는 만화나 어린이 도서는 사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대금은 달러나 원화로 선지급도 가능하다고 하는 등 적극적으로 매입 의사를 밝혔다.
2019년 개관 당시 서울책보고 모습. 김현동 기자
C씨는 또 “헌책방들 가운데 대량 판매(수백~수천 권 단위)가 가능한 서점을 소개받거나, 운영진을 통해 일괄 구매를 협의할 수 있는 방법이 있냐” “판매되지 않고 장기 보관 중인 재고나 기증 도서 중 외부에 일괄 판매가 가능한 물량이 있냐” 등을 물었다.
서울책보고는 2019년 대형 헌책방으로 시작했다. 헌책방 25곳이 한 곳에 모여 약 12만 권의 헌책을 판매했다. 2024년 헌책 판매는 종료하고 현재는 새책 서점과 복합문화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 포털사이트 구글에 ‘secondhand bookstores in Korea’(한국의 헌책방)라고 검색하면 서울책보고가 상위에 노출된다. 이를 보고 C씨는 연락한 것으로 보인다.
김수현 서울책보고 본부장은 “우린 더이상 헌책방이 아니라고 답장을 보냈다”며 “그땐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AI 기업이 학습을 위해 한국어 중고책을 사는 게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C씨 등 B사 관계자들은 지난 8월 18~21일 한국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방한 때 예스24 중고서점 운영 관계자들과 만났다. 예스24도 앞서 서울책보고와 비슷한 이메일을 받고 미팅을 잡은 것이다.
지난달 17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모스콘센터에서 열린 기술 행사 ‘드림포스 2026’에 앤트로픽 로고가 전시돼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예스24에 따르면, B사 관계자들은 “예스24가 우리 쪽으로 책을 직접 발송하지 말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자신들이 운송 업체를 직접 알아보겠다고 했다. 해외에서 확인된 헌책 대량 매입도 이런 운송 방식으로 이뤄져, AI 업체로 헌책이 흘러들어가는지 명확히 확인이 안 됐다. B사 관계자들은 또 “전문도서 매입을 희망한다”고 밝혔고, 역시 어린이·아동 도서는 매입하지 않는다고 했다.
예스24 관계자는 “외국에서 이렇게 대량으로 헌책을 산다고 한 건 처음”이라고 말했다. 8월 말 미팅 후 현재까지 B사의 추가 연락이 없어 아직 거래는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전국에 중고서점을 운영 중인 알라딘에는 이런 연락이 없었다고 한다.
B사는 서울책보고와 예스24에 “미국 내 한국어 도서 수요가 꾸준히 늘고 있다”는 점을 구매 이유로 밝혔다. 그러나 서울책보고가 받은 이메일과 예스24 미팅 내용을 종합하면 AI 학습을 위해 구입하는 것이란 의심이 가능했다.
지난 8일 기자가 이메일을 통해 C씨와 접촉해보니 B사는 여전히 한국어 헌책 대량 매입은 진행하고 있었다. 그는 “도서별로 한 권씩 매입한다”며 “전체 권수보다 도서의 종수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AI엔 동일한 책을 다시 학습시킬 이유가 없다.
세계에서 벌어지는 헌책 대량 매입
C씨는 매입에 관심 있는 도서 분야는 성인 대상 비문학이며, 구체적으로 학술서, 전문서, 경영·경제, 과학, 역사, 인문학, 예술·디자인이라고 했다. 만화, 종교 서적, 어린이책, 학습 참고서, 잡지, 영어로 된 책은 매입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소설은 (매입) 우선순위가 낮다”고 했다. 책 표지 상태는 아무 상관 없다며 “누락된 부분 없이 온전하고 읽을 수 있는 상태면 된다”고도 했다.
AI 학습을 위한 것으로 의심되는 헌책 대량 매입 시도가 국내에서 확인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앞서 미국에선 지난 7월 최종 결론난 재판을 통해 엔트로픽이 책 최소 50만 권을 사들여 학습시킨 뒤 파기한 것으로 드러났다. 독일 베를린에서는 ‘1970 운전면허 시험 안내서’ 같은 중고 책까지 대량으로 팔려나간 일이 있다. 지난달 일본에서도 헌책방 곳곳에서 정체불명의 주문이 쏟아졌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렇게 매입된 헌책은 미국 대형 물류창고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