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한 상처를 겪은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갈까. 흔히 불행을 지난 이들이 평생 고통과 슬픔의 그늘에 갇혀 지낼 것이라 넘겨짚곤 한다. 타인의 비극을 쉽게 단정하고 한 개인의 현재와 미래마저 그 사건 하나로 규정하려는 관성 때문이다. 그러나 상처가 한 사람의 인생 전부일 수는 없다.
윤가은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 ‘세계의 주인(The World of Love)’이 한국과 해외 영화제에서 주목받은 이유는 바로 이 서사의 관성을 뒤집은데 있다.
‘우리들’(2016), ‘우리집’(2019)에 이어 청소년의 내면을 섬세하게 포착해 온 윤 감독은 순제작비 약 70만 달러 규모의 저예산 독립영화로 이번 신작을 완성했다. 영화진흥위원회와 지자체 영상위원회의 지원, 민간 투자 등을 모아 기존 상업 영화 제작 방식에서 벗어났지만 작품이 남기는 무게감은 절대 가볍지 않다.
깊이 있는 시선은 거침없는 수상 실적으로 입증됐다. 제62회 백상예술대상 감독상(윤가은)과 신인여우상(서수빈)을 비롯해 바르샤바국제영화제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상, 낭트 3대륙영화제황금열기구상, 부일영화상 작품상·여우주연상, 핑야오·홍해국제영화제 주요 부문을 석권했다.
지난달 24일 LA 하모니 골드 프리뷰 하우스에서 열린 제1회 LA한국영화제 개막식에서도 개막작으로 상영되며 LA 관객에게도 깊은 울림을 남겼다.
영화가 호평을 받은 핵심은 성폭력 사건 자체보다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여고생의 일상과 선택에 카메라를 고정한 점이다. 피해자를 고통에 갇힌 존재로 묶어두지 않고 사랑하고 갈등하며 성장하는 한 인간으로 그려냈다. 윤 감독은 성폭력 생존자의 이야기가 또 다른 상처가 되지 않도록 긴 취재와 고민을 거쳤고 신파나 자극적인 폭력의 재현 대신 ‘시선의 전환’을 선택했다.
개막작 상영 이후 진행된 관객과의 대화에서 윤 감독은 “폭력과 상처는 오래 묵혀둔 숙제였다. 취재와 피해 생존자 인터뷰를 거치며 비극 그 자체보다 ‘그 이후의 삶’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고통 속에서도 매일의 일상을 버텨내는 이야기가 더 많이 필요하다고 느꼈다”고 연출의 출발점을 전했다.
영화 속 주인공 ‘주인’은 슬픔에만 젖어 있지 않는다. 때로는 당돌하고 때로는 이기적이거나 충동적인 태도로 타인과 부딪히며 자기 방식의 삶을 개척한다. 윤 감독의 말처럼 끔찍한 일을 겪은 이 역시 아픔을 품은 채 매일의 일상을 마주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세계의 주인’에서 ‘주인’은 주인공의 이름인 동시에 자기 삶과 세계의 참된 주체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영어 제목 The World of Love 역시 상처 속에서도 끝내 사랑을 열망하고 찾아 나가는 소녀의 여정을 담고 있다.
‘주인’의 걸음을 따라가다 보면 타인의 아픔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시선을 직면하게 된다. 위로라는 명목 아래 누군가의 삶을 특정 사건 하나로만 단정하고 그가 스스로 일상을 꾸려갈 가능성까지 가려버리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되는 대목이다.
상처를 이해하는 것과 그 상처로 사람을 규정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고통을 외면해서도 안 되지만 고통만으로 한 인간의 삶 전체를 설명할 수도 없다.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웃으며 누군가는 아무 일 없는 듯 하루를 살아낸다. 그 어떤 삶의 방식도 타인이 함부로 재단하거나 해석할 수 없다.
이 영화가 일깨우는 진정한 가치는 상처를 지워내는 방법이 아니다. 비극이 휩쓸고 간 자리에서도 삶은 계속되며 그 삶의 방향을 결정하고 이끌어갈 권리는 오롯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 앞에서 가져야 할 유일한 태도는 그의 삶을 대신 정의하려는 오만을 거두고 그가 자기 세계의 주체로 당당히 서도록 곁을 지키는 존중이다.
타인의 시선과 규정에 꺾이지 않고 끝내 자신의 일상을 걸어나갈 때 누구든 비로소 자기 삶과 세계의 진정한 주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