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흰 천으로 뒤덮인 무대 위에 하얀 옷을 입은 두 배우가 나란히 선다. 둘이 한국어와 프랑스어로 번갈아 가며 대화하는 사이 배우의 목소리는 폭설이 쏟아지는 제주로, 군경의 학살로 마을 사람들이 희생된 과거로 관객을 데려간다. 배우가 문장을 읽고 잠시 숨을 고르는 순간, 목소리에 실린 기억과 감정이 관객의 머릿속에서 저마다 다른 장면으로 피어난다.
지난 10, 11일 서울 신수동 서강대 메리홀 대극장 무대에 오른 낭독극 ‘새’ 공연 장면. 사진 2026 SPAF
지난 10~11일 서울 신수동 서강대 메리홀 대극장에서 공연한 낭독극 ‘새’의 한 장면이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한강의 소설『작별하지 않는다 1부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프랑스 연출가 줄리 델리케가 연출하고, 프랑스 배우 이자벨 위페르와 한국 배우 이혜영이 출연한 이 작품은 지난 7월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세계 초연한 뒤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초청작으로 국내 무대에 섰다.
낭독극이 독자적인 영역을 넓히고 있다. 공연 제작 과정에서 작품의 성공 가능성을 실험하는 쇼케이스나 정식 공연에 앞선 단계로 여겨졌던 낭독극이 문학 작품과 고전 희곡을 새롭게 변주하는 무대로 변모했다. 이번 ‘새’ 공연이 400석 남짓 객석을 모두 채울 만큼 관객들도 호응하고 있다.
‘새’뿐만 아니라 문학 작품을 낭독극으로 만나는 무대가 연이어 마련되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아르코)는 이달 7일부터 31일까지 ‘2026 아르코 문학극장’을 통해 낭독극 5개 작품과 낭독회 4개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다. 지난 7~8일에 김애란의『이물감』이, 10~11일에는 고재귀의『어딘가에, 어떤사람』이 낭독극으로 관객을 만났다. 이어 오는 21일에는 서울 서교동 소극장 산울림에서 김보영의『지구의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다』, 23일에는 성해나의『혼모노』가 낭독극으로 새롭게 펼쳐진다. 각각 황현빈, 박원상 배우가 참여한다.
같은 장소에서 오는 24일에 열리는 배삼식의 『화전가』를 원작으로 한 낭독극에는 배우 예수정이, 25일 한강의『소년이 온다』는 배우 박정자가 출연한다. 작품마다 배우의 낭독에 입체 음향, 대사를 투사하는 영상 등이 더해진다. 아르코 관계자는 “문장의 목소리를 따라가고, 음악과 소리를 듣고, 배우의 연기를 바라보며 서로 다른 언어와 영상을 만들어내는 장면을 경험할 수 있는 자리”라며 “문학을 새로운 감각으로 만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예술의전당에서도 한국 문학 낭독콘서트를 연다. 일제강점기 당시 저항과 민족의식을 보여준 작가 현진건의 작품을 목소리로 전한다. 지난 10일『운수 좋은 날』에 이어 16일에는 『연애의 청산』이, 17일에는 『그립은 흘긴 눈』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내 계단광장에서 낭독극으로 관객과 호흡한다.
창작집단 공놀이클럽은 올해 안톤 체호프의 작품을 낭독극으로 풀어내는 ‘사계절 체홉’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9월 무대에 오른 ‘세 자매’ 공연 모습. 사진 강훈구 페이스북
낭독극을 통해 고전 희곡을 새롭게 읽는 시도도 이어진다. 창작집단 공놀이클럽은 올해 안톤 체호프의 작품을 낭독극으로 풀어내는 ‘사계절 체호프’를 서울 대흥동 마포아트센터 플레이맥에서 진행하고 있다. 지난 4월 낭독극 ‘벚꽃동산’, 6월 ‘바냐 아저씨’, 9월 ‘세 자매’를 선보였으며, 11월에는 ‘갈매기’를 무대에 올릴 예정이다. 공놀이클럽의 강훈구 연출은 “체호프를 어렵고 지루하다고 여기는 분들에게 유쾌하게 풀어낸 호프의 네 작품을 보여드릴 것”이라고 했다.
낭독극은 좀처럼 보기 어려운 최신 해외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특별한 무대 장치가 없어 제작비와 준비 기간이 크게 줄어들 수 있는 만큼 다양한 신작 희곡을 빠르게 올려 관객의 반응을 확인할 수 있다. 오는 14, 15일에는 홍콩 출신 극작가 팟토얀의 ‘네오메트로 폴리스’, 일본 가마사토 유다이 극작의 ‘발파라이소의 긴 비탈을 내려가는 이야기’가 국내 극단 돌파구의 전인철 연출의 손을 거쳐 낭독극으로 국내 관객 앞에 선다.
한귀은 경상국립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일반적인 연극 각색에서는 서술이 대사나 행동으로 전환되는 경우가 많은 반면 낭독극에서는 서술과 인물의 말, 묘사와 사건이 목소리 안에서 공존할 수 있다”라며 “그런 점에서 낭독극은 문학과 연극이 서로의 고유성을 유지하면서 만나는 형식”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낭독극에 존재하지 않는 무대 장치는 관객의 상상력과 기억이 개입할 수 있는 여백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관객들은 일반 연극과는 또 다른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배우에게도 낭독극은 색다른 경험이다. 지난 10일 ‘새’ 공연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자벨 위페르는 “문학의 언어와 연극의 언어는 서로 다르다”며 “한강 작가의 문장들은 독특한데, 그런 언어를 낭독을 통해 재현해야 하니 텍스트의 재현과 언어에 대해 집중해서 준비했다”고 말했다. 이어 “낭독극은 암기에 의존하지 않으니 오히려 더 연극적인 퍼포먼스에 다가가게 된다”고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