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란 한쪽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상황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과불급(過不及)의 도리이며, 편착심을 여의는 공부다. 예민한 양팔저울처럼 한쪽으로 치우친 것을 바로잡으려다 보면 반대쪽으로 기울기 십상이다.
설교 원고 위쪽에 ‘당당하면서 겸손하게’라는 말을 적어 두곤 한다. 소심한 탓에 자신감이 없어 보인다는 지적을 받아 당당해지려 노력했더니, 어느 순간 건방져 보인다는 말이 들리기 시작한다. 소신과 원만함도 마찬가지다. 소신이 강하면 화합하기 어렵고, 원만함을 중시하면 시류에 휩쓸리기 쉽다.
종교생활에서 특히 균형을 이루기 어려운 것이 믿음과 이성의 관계다. 몇 년 전, 컴퓨터공학 박사학위를 가진 분이 교당을 방문했다. 기독교보다 불교가 과학적이어서 매력을 느꼈는데, 원불교는 더 과학적인 것 같아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그분은 종교의 모든 가르침도 논리적이고 경험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이를 통해 진리의 궁극에까지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듯했다.
종교적 가르침도 합리적인 비판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으나 과학으로 확인할 수 있는 영역과 종교가 탐구하는 영역이 꼭 같다고 하기는 어렵다.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종교적 믿음이 정당화될 수 없듯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고 거짓이라 단정할 수도 없다. 이성의 한계와 불교 수행에서 믿음의 의미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느라 진땀을 뺐다.
반대로 적지 않은 종교인들이 믿음에 가려 합리적인 판단을 소홀히 한다. 지도자의 탈선에는 무비판적인 신도들의 책임도 없다 하기 어렵다.
불교에는 ‘믿음으로 불법의 바다에 들어가고, 지혜로 건넌다’는 말이 있다. 원불교에서도 신심을 법을 담는 그릇에 비유하면서, 연구공부로 이치를 밝히고 취사공부로 실천하도록 가르친다.
믿음과 이성이 반드시 반대되는 것은 아니다. 이해가 될수록 믿음이 깊어지고, 믿음이 깊어질수록 이해가 수월해진다. 문제는 믿음이 맹신으로, 이성이 독선으로 흐르는 것이다.
성자의 가르침을 접할 때 세 가지를 살펴보면 좋겠다. 이치에 맞는지 따져 보고, 이해하지 못한다고 무조건 부정하지는 않는지 돌아보고, 가능한 것은 직접 실천하며 확인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마음을 열고, 이성으로 살피며, 실천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필자도 오랜 시간 칼럼을 써 오며 단련된 비판적 사고 때문에 종교적 직관이나 신심을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은지 염려된다. 원불교에서 경계하는 불신, 곧 의심하기를 좋아하는 습관이 안 생겼을 리 없다.
스승의 말씀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처음부터 의심하는 것도 불가에서는 크게 경계해야 할 태도이다. 분별하는 지혜는 밝아져야 하지만, 이것이 신심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중도는 산술적 중간이나 적당한 타협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에 대한 집착까지 경계하는 공부다. 양팔저울은 한 번 수평을 이루었다고 언제나 균형을 유지하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마음이 어느 쪽으로 기울고 있는지 끊임없이 살피는 것. 그것이 일상에서 실천할 중도 공부다.